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아주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한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치는 경우는 많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 생활범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다. 나는 혜화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 안의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밖의 사람들이래봤자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다. 명동은 조금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명동 안의 수많은 외국인들은 ‘여행객’이라는 특정한 카테고리에 묶이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라 그들 각자의 개성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난생 처음으로 다녀온 중국 여행은 전혀 새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고 내가 그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온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모습으로라도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인’들을 보고 왔다는 점에서 이번 중국 여행(?)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런 만큼 각자의 사정도 다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집떠나와 개고생’이었을 거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냥 해외관광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동기들과 함께하는 ‘졸업여행’이었을 거다. 그런 각자의 사정들 중, 내 사정은 조금 특이한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을 보았고, 또 사람을 만났다.
이번 6일간 내가 접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다. 길림성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 길림신학교의 신학생들, 그리고 먼발치에서 보았던 북한 사람들. 이 중 신학생들은 조금은 특별한 상황에서 만났고 그들 역시도 우리와의 만남이 ‘특별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생활’을 보고 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길림성의 중국인들과 압록강 너머의 북한 사람들. 그들은 말 그대로 ‘생활인’들이었다. 사실 이들의 생활에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소팔가자에서의 만남을 제외하면 나는 중국사람들을 계속 그냥 지나쳐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그들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으므로, ‘유람선을 타고 구경’한다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을 통해 나는 그들의 생활을 약간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북한 당국에 의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이었을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기에 그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날것’에 가까웠다.
두서도 없이 주절대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을 만나고 왔다. 그러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그들을 내 기준에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중국 시골의 많은 것들은 참 열악했다. 곳곳에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고, 낡지 않은 거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은 포장이 덜 되어 질척거렸고, 아이들은 헌옷을 입고 머리를 박박 깎은 채 흙길을 뛰어다녔다. 사방에 옥수수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6~70년대를 연상시키는 삼륜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나다녔고,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암흑에 묻혀 버렸다.
강건너에서 구경한 북한의 모습은 더 열악했다. 낡은 건물들, 추운 날씨에 강가에 나와 물고기를 잡고, 물가에 나와 빨래를 한다. 북한의 모습은 잠깐 본 것이라 묘사할만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열악하다’는 느낌을 갖기엔 충분한 모습들이었다. 중국이나 북한 사람들의 모습 모두,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번화가인 혜화동과 명동에서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불쌍하다’고 느껴질 만한 광경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과연 ‘불쌍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비포장 도로에서 삼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불쌍한 것일까?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불쌍한 것일까? 나는 어쩌면 지극히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성찰을 거치고 나니 더이상은 그들의 꾀죄죄한(사실 이 표현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모습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그들의 생활세계 안에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특별히 불쌍하지도,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을 내가 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그 시점에 나와 버스 안에 있던 이들은 온갖 전자기기를 손에 쥔 채 화려한(=비싼) 옷을 입고 앉아 있었지만 썩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랜 이동으로 다들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마트폰 하나 없이 해진 옷을 입은 그들도 의외로 썩 불행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내 기준에서 ‘결핍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 그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한 번 의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나자, 그들의 생활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소박한 삶이 어쩌면 우리의 으리으리한 삶보다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비싼 물건들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면서도 불안해하고 부족해하면서 살지 않나. 하지만 그들은 자기 몸만 가지고도 썩 나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상투적인 말로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란 말들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항상 그러던 대로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다른 이들의 생활을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행복의 여러 가지 모습(물론 그들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을 발견하게 해 준, 또 ‘생활인’으로써의 사람들을 경험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덧붙이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자 유람선에서 북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왔다는 게 굉장히 껄끄러워졌다. 물론 그런 방법이 아니면 그들을 볼 수조차 없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방법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동물원의 동물들 구경하듯이 구경하고 왔다는 게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관광객’과 ‘피관광체’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하게 들었다. 우리는 언제쯤 그들을 인간으로 만날 수 있을까.
딴짓을 하면서 글을 쓰니 글이 중구난방이 되었다. 이해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