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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B cut

강론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이 빈약한 묵상으로 할말을 제대로 생각해놓지 않은 탓이긴 하지만, 가끔은 진짜로 신나게 써 놓고 나니 뭔가 내용이 어렵거나, 딴길로 샜거나 해서 확 엎고 다시 쓰는 경우들이 있다. 그렇게 쓰는 두 번째 강론은 보통 평이한 내용이 되기가 쉬운데, 그렇다보니 순식간에 다 쓰게 되어 ‘아 이럴거면 나는 왜 몇시간씩 그런 어려운 쌉소리를 쓰느라 고생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허탈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썼지만 읽지 못한 강론 ‘B cut’들이 몇 개 있다. 물론 뭐 안읽고 넘어갔으니 그냥 버리면 되는 거지만, 가끔은 이 B cut도 조금 아까울 때가 있다. 강론이란 게 제한된 시간(얼마전 교황님이 10분이 넘어가는 강론 가지고 뭐라고 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안에 글이 아닌 말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보니, 내가 아무리 기가 막힌 내용을 준비했더라도 그게 10분 내에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면 쓰기가 곤란하다. 그 말인즉슨, 내용이 거지같아서 버린 건 아닐 때도 있다는 뜻이고(물론 내용이 거지같아서 버린 경우가 태반이다) 내용을 좀 더 길게, 또 글로 전달한다면 꽤 그럴 듯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아까운 강론 B cut을 어디 블로그 같은 데에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냥 날리기는 아깝고, 어차피 올해 못 써먹은 강론은 내년에도 못 써먹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올해 부족했던 강론이 내년에는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다). 그렇지만 좀 더 여유있게 써도 되는 ‘글’로써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내 게으름이 그런 B cut의 모음집 발행(?)을 방해하고 있는 것도 있고 그 B cut이란게 어디다가 따로 모아 놓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원대한 계획이 현실화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A cut 강론도 따로 발행을 안하는데 무슨 B cut까지 모아놓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뭐 어쨌거나 유사글쟁이가 된 덕분에 글은 매일 오지게 쓰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밑천이 애진작에 드러나 매일매일 머리를 싸매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못써서 펑크를 낸 적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 다른 놈들은 한시간만에 뚝딱뚝딱 써 놓고 놀던데 나는 왜 그게 잘 안돼서 몇시간씩을 날려먹는지 모르겠다(‘시간을 날려먹는다’는 건, 실제로 강론 쓰다가 진도가 안 나갈 때 딴짓을 하는 시간이 많아서 하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맹글어낸 강론이 질도 별로라면… ‘글 좀 쓴다’고 자만했던 예전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이러니 내가 브런치를 계속 까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또 쓸데없는 넋두리였지만, 나도 명쾌한 내용으로 후다닥 강론 생산해내는 그런 ‘직관적’인 신부가 되고 싶다. 되지도 않는 짱구 굴리면서 골방철학자 같은 내용 썼다가 갈아엎는 그런 멍청한 짓좀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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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 글쟁이

어쩌다보니 거의 매일 글을 쓰고 그 글을 여러 사람들에게 읽으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읽기 위한 글이니 정통 글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매일 2천 자 가량의 글을 쓰면서 살아가니 어느 정도 글쟁이 비슷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나는 직업적 글쟁이가 된 것이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직업적 글쟁이들은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없던 글빨도 솟아나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마감이 다가와도 글을 못 써서 헤맨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기적적으로 좋은 글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새벽 두시에 쓴 글도 결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몇 차례에 걸쳐 깨달은 다음 ‘초보 직업적 글쟁이’로서의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 내가 마감이 닥쳐도 글을 못 쓰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신학교 입학 초반에 내 특기를 ‘짧은 내용을 길게 늘여쓸수 있다’는 걸로 어필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확실히 그랬다. 보고서가 쓸 게 없어도 어영부영 지껄이다 보면 분량은 금방 채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뻥튀기된 글이 꽤 그럴듯했다. 나는 이렇게 꽤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학교에서의 7년이 지나고, 7년 동안 철학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배웠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소박하다) 이제 더이상 아무 소리나 지껄여서 분량을 뻥튀기하는 스킬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뭐 이바닥의 글이 너무 난해한 탓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그런 글에는 일종의 ‘혼’을 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 줄의 글을 한 줄로 줄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글이 아닐까. 온갖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갖다 붙여서 한 줄짜리 글을 열 줄짜리로 만든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한 줄의 내용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은 확실한 ‘청자’가 있는 글이다. 글을 쓰고 읽으면 바로 반응이 온다. 쌉소리를 써서 분량을 채우면 잠은 잘 수 있지만, 다음 날 읽고 나서 영 개운치가 못하다. 사실 반응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내가 찜찜하기도 하고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게 든다.

마음 속에 채워진 게 없는데 글을 쓰는 건 참 어렵다. 계속 글을 쓸 거리를 마음 속에 채워 넣어야 하는데 영양가 있는 건 채우지 못하고 하루종일 유튜브나 보면서 낄낄대고 있으니 이미 바닥난 밑천이 채워지지 않아 조급한 마음만 든다. 그래서 다른 글쟁이들은 늘 자료조사를 하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각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 나도 ‘자료조사’를 해야 하는데 정작 하지는 않고 해야지 해야지만 하다가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 근본 없는 글쓰기를 하고 허겁지겁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뭐 사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도 해야지 해야지 하는 소리의 일종이니. 이런 쌉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내가 할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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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 불일치

지난 2월 1일부로 ‘말씀의 봉사자’가 되었다. 제단 위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강론’의 권한이 생김으로 인해서.
덕분에 그래서 주기적으로 남들에게 ‘고상한’ 말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내가 다른 이들, 특히 많은 이들 앞에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나 역시 그런 기회를 주도적으로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하기 싫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젠 반드시 주기적으로 교훈적인(물론 반드시 교훈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부족한 인간인 내가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참 영광이고 감격스럽고 그렇다. 이게 싫다는 생각은 (아직까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문제는, 내가 그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주제넘게 떠들어댄 그 이야기를 나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더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은 주일학교 강론이 있었다. 그날 복음이 참행복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피안의 행복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좀 벅찬 것 같아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와 우는 이들에게 보여 주시는 관심을 주제로 강론을 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론이 끝나고 미사도 끝나 성당 밖으로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다가왔다. 신부님이냐고 물어보길래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은 부제라는 걸 잘 모르는듯 했지만 수단을 입고 있으니 성직자인가보다 했나보다. 아무튼, 그 사람은 어렵게 나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며 만원만 달라고 청했다. 천원도 아니고 만원. 하지만 그때 나한테는 지갑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동행하던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따라 들어가 할 일이 있던 나는 좀 난감해졌다. 난색을 표했더니 급했던지 사무실에라도 가서 좀 빌려줄 수 없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성당 직원분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사적으로 돈을 빌릴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며 곤란함을 드러내니 그 사람은 뭐라도 해 줬으면 하는 표정으로 계속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먼저 간 사람들을 얼른 쫒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나는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를 떠나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갑을 가지고 나와 도와드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방이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 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 분 전에 했던 강론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내가 내 입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는데.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자고 내가 이야기했는데. 불과 몇 분 전에.
괴로웠다. 강론대에 올라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 놓고 정작 나는 가난한 사람을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렸다. 뭐 물론 사기꾼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만 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만원을 가진 사람이었고. 내가 내 입으로 떠든 대로라면,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아, 나는 강론대에 올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같은 내용으로 하게 될 두 번째 강론을 하기가 두려웠다. 이미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어린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거 좀 늦게 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텐데. 들어가서 지갑 좀 가지고 나오는게 그렇게나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나. 내가 예수님을 모른 척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한 내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론을 새로 쓸 시간은 없었고, 나는 결국 (거짓말이 되어버린) 준비한 강론을 다시 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그렇게 살기가 참 어렵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사족으로 붙인 채.

좋은 말을 하기는 참 쉽다. 오랜 기간의 학습과 배움으로 우리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답에 가까운 그럴듯한 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말이 참말이 되도록 살기는 쉽지 않다. 나도 안 하는 걸 남보고만 하라는 건 위선일 뿐이다. 강론이란 걸 하게 된 지 불과 3주만에, 나는 내 위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좋은 말’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된 것 뿐이지. 그래서 계속 좋은 말은 할 거다. 어차피 이제 그게 내 직분이 되었으니까. 대신, 그 ‘좋은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할 거다. 나에게 그런 좋은 말을 많은 이들 앞에서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분을, 또 그런 말을 고맙게도 잘 들어 주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