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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사람

* 9년전에 써놨던 글을 발굴해서 업로드. 9년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난 참 열정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젖 먹던 힘’을 짜내 본 적이 몇 번 되지 않았던 것 같고, 남들이 다 죽을 것처럼 노력하던 고3시절이나 취업준비생 시절에도 그냥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연봉인상을 위해, 승진을 위해,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위해 할짓 못할짓 다 하면서 살아가는 치열하고도 치열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여유를 부리면서 살아왔다. 물론 그게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아 항상 야근과 조기출근, 휴일근무에 시달리던 나날들이었지만, 야근을 할지언정 내 사정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다소 나태한 마인드가 신입사원 초기의 얼마간을 제외하고서는 항상 몸에 배여 있었다. 그리고 뭐 따지고 보면 내가 빵구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열정 그런 거 없이도 다 잘 해왔고 잘 살아왔다. 다만 ‘더’ 잘 살 수는 없었던 것일 뿐.

그러고 보면 내가 살아온 방식은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인 ‘담백함’과 참 닮았다. 어쩌면 내가 담백함을 좋아하는 것과 내 인생이 닮은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담백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난 참 한국사람답지 않게 매운 맛, 신 맛 이런 극단적인 맛보다는 담백함이 참 좋다. 말이 좋아 담백함이지, 한국사람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싱거움’에 가까운 맛이다. 이도 저도 아닌 맛, 딱 집어서 특징이 없는 맛, 밍숭맹숭한 맛이고 이걸 사람한테 갖다 붙이면 썩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을 그런 단어이다. 어떤 면에서는 ‘회색분자’란 표현하고도 닮아 보인다. 새빨간 사람도, 새파란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 따지고 보면 담백함이란 표현은 어쩌면 온갖 허접하고 부실한 특징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난 ‘담백함’이 좋고 담백한 사람이 좋다.

그래도 ‘담백한 사람’이라고 하면 뭔가 깊이가 있어 보이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사실 담백함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오랜 시간 끓여낸 사골국물, 은근히 우려낸 멸치국물, 자극적인 소금간 없이도 식감을 돋우는 그런 맛.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그런 맛은 아닐지라도, 식탁을 떠나면서 생각나고 잠자리에 누우면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그런 맛.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열정적인 사람, 굉장히 멋있다. 팔을 걷어붙이고 소리를 질러가며 야근에 철야에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완수하고 성대한 축하자리에서 비싼 양주를 들이킬 수 있는 사람, 열 명 중 여덟아홉명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로 그런 사람. 나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 부러워 보였고 그런 사람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별로 나이도 지긋하게 먹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그냥 나는 담백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묵묵히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남들은 잘 모르거나 심지어 ‘뭐 이런걸?’하고 무시할만한 나만의 여가활동을 즐기며, 크게 기뻐하지 않고 크게 슬퍼하지 않는 삶. 언젠가부터 그런 삶이 ‘이상적인 내 삶’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나는 그런 삶을 위해 얼마 전부터 방향을 바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새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으리으리한 관광지보다는 그냥 동네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게 좋고, 어제 나온 최신 음반보다는 오래되고 사람들도 잘 모르는 괴상한 음악들이 좋다. 굳이 1등을 하고 싶지도 않고, 남들에게 크게 주목 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좋은 집과 좋은 차가 탐나지도 않고(물론 누가 공짜로 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전도유망한 능력과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직책도 별 관심이 없다. 어찌 보면 누가 봐도 평범한 소시민의 삶, 전형적인 꿈 없는 루저의 인생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잘해 봐야 육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일 인생(성경에 나오는 표현인데 요즘은 이것보단 더 오래 산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내 스스로도 참 영감님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정말 그렇다. 일희일비하면서 죽을 둥 살 둥 사는 것보다는 담백하게 사는 게 훨씬 편안하게 사는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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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공포증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경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실 내가 진짜로 경쟁을 싫어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지는 걸 싫어하는건지 나도 헷갈리기는 하다. 근데 지는게 싫든 경쟁이 싫든 나는 어쨌거나 그 이유 때문에 경쟁을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한다. 이게 경쟁을 싫어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난 경쟁이 싫다.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살다 보면, 경쟁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좀 의아하다고 여기게 될 때가 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사태가 기억이 난다. 뭐 나야 그사람들이 정규직이 되든말든 상관없는 사람이어서 ‘고용보장 받으면 좋겠네’ 정도의 박애주의적인 태도로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인국공 사태에 분노하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인국공 사태가 철없는 몇몇 이들의 배배꼬인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보편적인 반대정서에 부딪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인국공 사태에 분노했나? 내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서는 뭐라 평가할 수가 없으니 넘어가고, 내가 만난 ‘인국공 사태 분노자’ 들을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경쟁적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한마디로 그들은 전부 공무원이었다. 사실 공무원 시험을 보러 저렇게 죽자사자 공부하는 사람들 역시 나는 이해가 잘 안 된다(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해를 못한다는 소리다). 어떻게 남들보다 1점 더 받으려고 저렇게 몇년씩 공부를 하지? 경쟁을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1점 모자라 떨어지는 시험을 붙기 위해 몸 상해가며 하기싫은 공부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일을 알아보는 방법을 택할 것 같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분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결코 아니다. 나는 경쟁이 싫은 사람으로서 경쟁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 뿐이다. 경쟁을 피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비록 경쟁을 이겨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작다 하더라도.

아무튼, 그런 초 경쟁적인 시험을 통과해서인지 그들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무혈입성’ 하는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나는 여러 뉴스나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수백 수천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절차 없이 승리의 결과물을 얻게 될 수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였을까? 여전히 나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인국공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그렇게 분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왜 분노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로 내 ‘경쟁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내가 경쟁을 싫어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은 별거 아닌 것들도 많다. 술게임을 하면 이기려고 발악을 하기보다는 그냥 술 먹지 하면서 패배자의 위치를 받아들여 게임을 김빠지게 만들기도 하고, 무슨 대항전 같은 걸로 축구 같은 걸 하면 (어차피 잘하지도 못하지만)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간을 때우며 승리를 갈망하는 팀메이트들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어렸을 때 오락실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그때 한참 핫했던 대전격투게임은 그렇게도 못했던 내 모습을 보면, 경쟁이 삶의 원리이자 즐거움인 사람들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통찰 아닌 통찰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난 경쟁이 싫다. 상대평가의 시대에 나만 만족하면 됐지 하는 삶을 살아서는 결코 윤택한 삶, 자랑하면서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삶이 문제가 아니라, 경쟁을 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의 위협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난 경쟁이 필요없는 세상으로 왔다. 물론 여기에서도 잘나가는 신부 못나가는 신부 비교는 늘 있고 나름대로의 경쟁과 줄세우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내가 경쟁에서 뒤떨어진다고 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사람들에게 경쟁이 삶의 원리라고 떠들지 않아도 된다. 비교우위가 아니라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공동선의 상태를 이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난 내 할일 하면서, 고만고만한 보통 신부로 살아가고자 한다. 경쟁이 싫다는 거지 할일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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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 이야기

 지금(2019년 2월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컴퓨터는(태블릿 ‘PC’를 제외한다면) 나온지 7년이 다 되어 가는 2012년 6월 출시 13인치 맥북프로(2012Mid)다. 아마 이게 비레티나 맥북 프로로는 마지막 제품일 거다. 지금 세대 맥북에서는 다 사라진 것들이 많이 달려 있다. DVD-rw(지금은 들어내고 그 자리에 HDD를 달아놓았다), 미니디스플레이 포트(요즘건 없더라고), ir리시버(이제는 애플샵 직원도 그 존재를 모르는 ‘리모콘’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물건) 같은 것들이 여기 다 달려 있다.

 이걸 살 때에는 물론 최신 노트북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였는데, 2012 맥북 라인업이 업데이트되자마자 샀으니 이 제품의 온라인 구매자로는 순위권 안에 들 수도 있다. 그때도 레티나 맥북 프로가 있었지만 더럽게 비쌌고 나에겐 그 정도의 성능이 필요치 않아서 그냥 맥북프로 라인의 저렴이(?)를 골랐었다. 이미 데스크탑은 게임용을 하나 쓰고 있었고, 예전 회사에서 맥북(화이트, 2007년 모델)을 썼었는데 퇴사 때 반납한 후 노트북의 필요성이 생겨서 산 거였으니 굳이 고성능이 필요 없었던 거지.

 아무튼, 사고 나서 잘 쓰다가(사실 이걸로 일은 얼마 안 했다) 신학교를 오게 되었다. 살고 있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성당으로 들어가는데 데탑은 집에 보내고 이 맥북만 들고 왔다. 그때 생각으로는 짐도 줄이고 게임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 왜 신학교 오면 게임을 안 할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쨌거나 그때부터 나는 다른 윈도우 컴퓨터 없이 이 맥북만 쓰게 되었다. 윈도우가 없는 환경에서 살면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고 또 학기중엔 학교 컴퓨터실을 쓰면 되니까 아주 치명적인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7년을 맥북 하나로 버텨 왔다. 다만 이제 연식이 꽤 된 컴퓨터이다보니 기본적인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이거 쓰는데도 자판이 밀리니 뭐 말 다 했지.(메모 앱이 많이 무거워진듯)

 이걸 처음 장만할 때에 비하면 맥북 사용자가 정말 많이 늘었다. 그때 맥은 진짜 쓰는 사람만 쓰는 물건 정도였고 그나마 부트캠프로 윈도우 깔아서 쓰는 사람도 꽤나 많아서 osx깔아서 쓰고 있는 사람 보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별다방에는 유난히 맥북이 많았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네이티브로 맥을 쓰는 사람도 많고 어딜 가나 사과가 번쩍이는 노트북 뒷판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요즘 맥은 사과에 불이 안들어오긴 하지만). 뭐 남이 뭘 쓰던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도 (전직)덕후의 마음이란 게 희소성있던 물건이 대중화되면 괜히 샘나고 그런 게 있어서 아쉬운 마음도 조금 들고 한다(왜?).

 점점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 가고 있다. 아무튼 오래 쓰다 보니 애착도 생기고 오래 되었음에도 아직까진 쓸만 해서 7년차 노트북임에도 현역으로 잘 써먹고 있다. 그러고보면 아무리 요새 osx가 문제가 많다고 해도 좋은 운영체제이긴 한 것 같다. 예전 윈도우 쓰던 때라면 7년전 모델을 쓰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물론 이걸로 최신게임을 돌리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사양에 크게 예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상편집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니 잘 만든 os인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당장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들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뭐 바꾸면 좋겠지만 워낙에 비싼 물건이기도 하고 지금 쓰는 데에 크나큰 지장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노인학대를 하고 있나 보다.

 나이가 들다 보니 점점 빈티지한 것들,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스마트폰처럼 좀 안 바꾸면 많이 느려져서 꽤 불편한 것들이 아니면 딱히 새로운 것을 장만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짐이 점점 는다. 어쨌거나 살아가면서 이것저것을 계속 사게 되는데, 예전 것들을 버리지는 않으니까. 이럴 바엔 그냥 아무것도 안 사는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지만 이게 또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안 사면서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들다. 또 워낙 자잘한 소품들을 좋아해 놔서… 그러다보니 옷장엔 입지도 않는 옷이 한가득이고(SPA브랜드 옷들도 다 튼튼해서 십년씩 입어도 멀쩡하다. 낡은 건 또 빈티지라는 명목으로 남겨 놓고) 서랍에도 온갖 쓰잘데기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다. 이런 와중에 7년이나 된 물건이 아직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좀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다. 특히나 노트북 같은 성능에 민감한 기기가 이렇게나 버텨 주니 말이다.

 사실 맥북으로 업무를 보는 건 예전부터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윈도우 쓸 땐 모니터가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수백 수천 행의 엑셀 데이터들을 편집하곤 했었는데, 이상하게 맥북으로만 하면 자연스레 느긋한 한량모드가 되어 업무를 해야 할 상황인데도 웹서핑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하기 일쑤였다. 10여년 맥북을 쓰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원인은 맥의 마우스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맥 마우스 커서에 가속도가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맥 운영체제인 osx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면 커서가 띡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스르륵 하고 움직인다. 말로 하려니 어렵네. 아무튼 그래놔서 코딱지만한 PPT 오브젝트를 미세하게 조정하거나 하는 데엔 썩 적합치 않다. 스크롤도 관성이 적용되어 있고… 그래서 빠릿빠릿하게 일을 안 하게 되나… 가 아니라 그냥 일을 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일보단 노는 것에 최적화된 내 맥북이지만 그래도 이걸로 레포트도 많이 쓰고 논문도 하나 쓰고 했으니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이걸로 논문 하나만 더 쓰면 된다. 그때까진 현역으로 잘 버텨주길.(그때되면 바꿀 여유가 되겠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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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욕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화가’다. 그림 그리는. 뭐 먹고살기 바빠 어떨 땐 취미로 그림 하는 사람들보다 더 그림을 멀리 하고 사시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본업은 ‘화가’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아직 가능태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꽤 전도유망한 미술학도셨다고 한다. 풍경을 자주 그리시다 보니 내 취향과는 다소 맞지 않지만(나는 조금 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 작품을 보면 나 같은 똥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며 화가가 맞긴 맞구나(아버지 죄송합니다ㅠㅠ)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덕에, 나도 예술적인 센스는 조금 있는 것 같다. 사실 이걸 뭐 내 입으로 이러쿵저러쿵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남들보다는 좀 더 예술적 기질이 있긴 한 것 같긴 하다. 아버지가 내가 어랬을 때 그림그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기 때문에(소질이 없다고 일갈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난하게 살거 같아 그러셨던 것 같다) 스킬이 없어서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재주는 없지만, 어쨌거나 머릿속에는 창조적인 생각이 들어있고 여건이 된다면 그게 결과물로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던 미술학원이라도 다녔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학원 누나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뭐 그거야 이미 수십년 전에 물 건너간 거니까… 포토샵으로 깨작거리고 있다 보면 나도 드로잉을 좀 할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타고난 피와는 달리 수련을 안해서인지 원래 재능이 없는건지 아무튼 중학교때 만화 그린다고 깝죽대던 시절 이상으로 나아지지 않아 좀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다.
 아, 원래 하려던 이야긴 이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드로잉 스킬은 물려받지 못했지만(잠재능력이 있을지도) 예술적 센스는 물려받은 덕분에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면서 산다. 뭐 그게 아트웍일때도 있고, 글일 때도 있고, 가끔은 음악일 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교 때 포토샵과 영상을 좀 배워서(둘다 독학이어서 고급기능은 모른다) 그 둘은 좀 만지기도 하고 덕분에 그걸로 밥벌이도 좀 했는데 그렇다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뭐 남의 거 수정이나 좀 할 줄 알았지… 글은 그래도 인정받은 몇 안되는 분야 중 하나인데, 그것도 큰 상을 타거나 한게 아니라 그냥 소소하게 논술 점수 좀 잘 맞고 교내/영내(군대) 백일장 같은거로 수상 몇 번 하고 그정도여서 내세울만한 게 1도 없다. 브런치도 까이고… 아무튼 그래도 글은 키보드만 두드리면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수월하게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분야이긴 한데 사실 내가 글을 진짜 잘 쓰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걸로 밥벌어먹겠냐 하면 그 수준도 아닌것 같고 해서 저는 글쓰기가 재능입니다 하기엔 좀 쑥스럽고 그렇다.
 어쨌거나 아트웍이나 글은 그래도 아~주 못 하는건 아니라서 그냥저냥 하면서 내 ‘예술적 욕구(?)’를 충족하곤 하는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었고 지금도 전혀 못한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잠깐 다녔는데 바이엘을 하다가 피아노 학원이 이사를 가버려 끊은 이후로 나는 어떤 악기도 배우거나 다루지 못했다. 아, 고등학교 때 풍물동아리를 했지만 뭐 그거야 활용성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도 음표를 못 읽는데 뭐. 물론 음악 못한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음악 분야에도 그놈의 ‘예술적 욕구’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할 줄 아는게 쥐뿔도 없는데 왜 음악은 만들어보고 싶은 건지. 세상이 좋아져서 나같은 음악고자도 다룰 수 있는 개러지밴드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도 있고 여기저기에 악기들도 널려 있지만, 다른건 투닥투닥 하다보면 결과물이 나오던데 음악만큼은 도대체 그게 잘 안 된다. 내가 기준이 너무 높나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럴듯하긴 해야지. 근데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도 잘 안되니 이게 참 답답할 노릇이다.
 글쎄, 음악과는 일절 관련 없는 사람이 왜 음악 못 만드는걸로 스트레스를 받나 싶겠지만(사실 스트레스까진 아니고) 나도 좀 잘했으면 좋겠다 싶은 열망이 있고 음악 잘 하는 사람 보면 부럽고 하는게 아무리 봐도 욕심 같은 내 심정이다. 뭐 음악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음악은 특별히 좀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그럼 왜 안 하나? 그러게. 끈기가 없어서인지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무튼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며(코드 몇 개 잡을 줄 아는 걸로 ‘기타를 칠 줄 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것 같다.
 결국 의식의 흐름대로 아스트랄한 글이 되어 버렸지만, 아무튼 창작욕이란 건 괴롭다. 내가 그 창작욕을 충족시켜 주지 못함에도 그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걸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나는 이 글을 쓰기 21시간 전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나왔다). 이게 다 재능 없이 센스만 물려준 아버지가 문제… 가 아니고 아무튼 앞으로는 이 창작욕을 좀 풀어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프로의 세계로 넘어 오면서 나는 아마추어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그걸로 밥벌이는 불가능하고 밥벌이와 무관한 일은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학교에 오면서 거의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해내야 하겠지만 가끔은 내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싶다. 어차피 이젠 그걸로 밥벌이를 하면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철저히 취미가 되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욕심부려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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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 생각과 행동들을 다 ‘관찰’하고 있는 것이 오직 나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꿔, 나는 나를 다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너무 당연하게 나는 나를 잘 알지! 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요 몇년간 이어진 생각들을 통해 나는 나를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나에 대한 생각들을 꽤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들에 대한 내부적인 피드백(반성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걸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 내가 왜그랬지’ 정도의)도 하고 있으며,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며 내 모습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기평가를 하기도 한다.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하며, 어떤 것이 바람직한 모습과 방향일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떄로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문제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양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을 것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하면서(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들은 점점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이렇게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내 모습이 내가 ‘창조해낸’ 더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의 본질 바깥에 있는 껍데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레이어’처럼, 내 본모습 위에 무언가를 얹어놓고 그것까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전까지 내가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또 내보여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 나는 과연 솔직한 사람일까. 다른 이에게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인간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내가 솔직하게 내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사실은 ‘레이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의 솔직함 자체에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 내 표면적인 경험(=과거)을 제외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해진다.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많은 것을 그냥 void로 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많은 부분이, 나 자신도 접근할 수 없도록 제한이 걸린 채 나머지 부분만을 보며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예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창조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그것이 본질에 기반하더라도). 그런 생각들을 계속하다보니, 이건 뭐 데카르트도 아니고 자꾸 극단적인 방향으로 의심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정도까지 내가 허상의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 정도는 있다. 뭐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여기까지 오고 만 거지.

 아무튼, 내가 들여다보고 내가 또 내보여주는 나의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제한된 일부분에 불과하고 나는 사실 나를 잘 모른다는 것 자체는 확실한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내가 모른다면, 남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상담도 하고 그러나보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제한적으로만 드러낸다면, 내가 드러내는 만큼만을 볼 수 있는 남이 나보다 많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뭐 그런 것이 심리학이고 정신의학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썩 미덥지는 않다. 나도 모르는 걸 남이 어떻게 알아 하는 생각과 함께, 결국 뭔가를 알아낸다고 해도 그건 그냥 추론에 불과한 거잖아 하는 생각이 그런 학문들에 대한 신뢰를 가로막는다. 사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굳이 알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요인이든 내부적인 동기부여든 내가 모르는 내 모습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걸 할 수 있도록 해 주는건 나 이외의 어떤 것(사람이든 학문이든)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든다. 물론 내 생각에 그건 단순한 ‘넛지’이상의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알아가야 하는 역할은 나 자신의 몫이겠지.

여담.
사이버스페이스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이런 글을 싸지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상인격’같은 것도 실현되지 않을까? 데이터형과 AI만으로 구현된, 실체 없이 인간을 ‘에뮬레이트’하는 인격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럼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 가상의 인격을 실제라고 생각하면서 소통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AI의 발전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지만, 만약 이렇게 인간의 (물리적이 아닌)외형적인 모습들을 가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에뮬레이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정리하면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생각했던 여러가지 것들이겠지. 그런 점에서 이 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그냥 글을 쓰는 동안 했던 생각의 ‘나머지’에 불과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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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중독

활자중독이란 요상한 용어(?)가 있다. 뭐 정식 병명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신조어 같은 걸로 추정되는데, 그렇다 보니 어떤 게 활자중독인지 정의하는 것도 제각각인 것 같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활자중독이란 단어를 듣고 어떤 이들은 ‘아 내가 바로 이 활자중독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인간들 중의 한 명이다.
이게 진단을 받는 병 같은게 아니라서, 내가 ‘활자중독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그 병명(?)에 걸맞는 증상(??)들을 찾아내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엔 음료수 라벨을 읽는 습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는데, 나는 음료수를 마시다가 별로 할 게 없으면 그 음료 캔에 써있는 글자들을 전부 읽는 습관이 있다. 그걸 대체 왜 읽냐고? 모른다. 모르니까 중독이지. 뭐 물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정말 갈증이 났거나 하는 경우에 그걸 읽고 앉아있지는 않지. 그렇지만 뭐 그냥 휴식을 하거나 하면서 음료수를 마실 때, 아니면 사람들과 앉아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음료 캔의 라벨을 읽는다. 
사실 내가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안 지가 얼마 안 되었다. 그냥 읽고 있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음료수의 성분이나 공장 위치 따위를 기억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읽는 거다. 내가 이런 습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니들도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십중팔구 미친놈 취급을 할 것 같아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 스스로도 이걸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습관을 인식한 이후부터는 그걸 읽고 있다가도 의식을 하게 되어 버려서, 순수한 의도(?)로 그 짓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활자중독인가? 뭐 활자중독이라고 하면 책을 닥치는 대로 읽거나 신문을 빠짐없이 읽거나 하는 따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 뭐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책을 평균보단 많이 읽고 있긴 한 것 같지만, 독서가로 인식될 만큼은 아니다. 신문 역시 읽으려고 가져다 놓고 폐지함으로 직행하는 것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뭐 물론 인터넷 따위에서 글을 많이 읽긴 한다. 근데 그건 남들도 다 그런거 아닌가? 심심하면 인터넷으로 뉴스 읽고, 블로그 읽고, 시시콜콜한 게시물들 읽고. 그런것들이 활자중독자의 증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보면 내 특이증상(?)은 오직 그 음료수 라벨을 읽는다는 그것 뿐인 것 같기도 하다. 아, 설명서 다 읽는것도 있겠다. 나는 설명서 안 읽고 버리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많은줄 몰랐다. 하지만 설명서 읽는 건 활자중독이어서가 아니라 새로 장만한 물건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것 같은데.

뭐 아무튼 글자 참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해져서인지, 아니면 이제 기억력과 집중력이 감퇴되어서인지 읽은 것 중의 상당수는 그냥 ‘읽었다’는 것 이상의 기억으로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이건 어쩌면 영양가 없는 텍스트를 대량으로 공급해주는 스마트폰의 영향은 아닐까? 쿠키 컨텐츠 위주의 읽기가 생활화되다 보니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저장이 줄어들어 버린 건 아닐까? 아직도 글을 읽는 건 즐겁지만, 열심히 읽은 것들이 영 생각이 안 나고 입안에서 맴돌 때엔 조금 짜증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벌써 이렇게 깜박깜박하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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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에 대한 무지(無知)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보 『성신』 21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소설가 김영하 씨는 산문집 『보다』를 통해 ‘부자’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을 보여 준다. 그는<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라는 글에서 진짜 부자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진짜 부자는 비싼 차나 집이 아니라 바로 ‘가난에 대한 천진난만한 무지(無知)’로 자신의 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평범함에 대한 무지’를 통해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낸다. ‘천진난만한 무지’는 비단 부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발견된다. 귀족들은 서민들의 삶을 모른다. ‘자유’라는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우리들은, 억압받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모르고 살아간다. 

때로는 그런 무지가 폭력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했던 마리 앙뜨와네뜨의 천진한 한마디가 가난한 프랑스 국민들을 분노케 하였듯이, 결핍에 무지한 사람들의 별 뜻 없는 한 마디는 너무나도 쉽게 폭력이 된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 등에서 접하고 분노하는 유명인들의 언행, 그것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런 평범함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들을 했을까? 그들은 그냥 자기에게 익숙한 사실들을 별 뜻 없이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한 마디가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이들은 평범함을 일부러라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평범함에 대한 무지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게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평범한 이들의 보통 삶을 의식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고 경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비록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평범한 이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살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얼마나 알고 살아가는가? 당장 우리 나라의 2-30대가 직면해 살아가는 현실에 우리는 관심을 갖고 사는가? 일부의 사람들이 아닌, 우리나라 대다수 서민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담장 너머의 화려함에만 관심을 갖고 정작 그 화려함 속에 숨어 있는 걱정과 고민에 대해서는 모른 채 세상을 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모른다. 우리에게는 취업 걱정도 없고, 스펙 걱정도 없다. 알바 걱정도 없고, 생활비 걱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것은 우리가 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이런 특권 속에서 사는 건 아니다. 지금도 담장 너머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수많은 걱정들을 안고 살면서, 그것을 잊기 위해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걱정에는 무관심한 채 그 걱정을 덮은 화려함에만 관심을 보인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세상의 아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당장은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아픔에 함께하고, 나아가 훗날 그것을 위로할 수 있는 이들이 되기 위해 당장의 분리된 삶을 산다. 우리가 세상과 떨어져 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이지 세상의 걱정과 풍파로부터 벗어나 고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담장 밖으로 눈을 돌려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고 그 아픔에 뛰어들 때 비로소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준휘 | 편집기자(aquinas.kim@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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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혼자 와서 화장실이 가고 싶을때

 별다방 같은 카페에 인터넷을 쓰러 종종 온다. 특히 신학교에 오고 나서는 교내에서 인터넷을 쓰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쓴다손 치더라도 영상 같은 고용량 데이터를 쓰기엔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보니 주말이면 인터넷을 쓰러 자주 오게 된다.

 뭐 사실 학교 오기 전부터 혼자 놋북 들고 종종 카페에 오곤 했다. 다니던 회사가 좀 자유로웠던 편이라 일이 안풀리거나 답답할 때엔 놋북을 들고 카페에 와서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일을 한 적도 있고, 시간이 애매하게 남으면 카페에 와서 글을 좀 끄적이다 가기도 했다. 뭐 지금이야 ‘안 올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카페를 자주 이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도 인터넷 쓰러 카페를 자주 오긴 했다는 말이지.

 아무튼, 이렇게 사람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인터넷 쓰러 놋북 들고 카페에 오면 참 난감한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다. 일행이 있다면야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겠지만, 일행 없이 혼자 오는 경우가 많은 나로써는(여럿이서 오면 생산적인 일 안하고 노가리만 까니까) 놋북을 깔아놓고 화장실을 가기가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그냥 가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만, 나는 쫄보라서 이 비싼 기계를 턱하니 올려놓고 자리를 비울 자신이 없다(고딩때 도서관에서 화장실 갔다가 워크맨을 하나 도둑맞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웬만하면 참거나 아니면 아예 짐을 싸서 일어나는 편이다. 근데 짐을 싸서 일어나기가 뭐할 때도 있는데, 아직 내가 카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때다. 시간이 좀 남았거나, 할일이 남았거나 하면 짐싸서 일어나기가 그렇다. 커피를 또 마실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걸 놔두고 일어나긴 싫다. 그래서 보통은 떠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지 않으면, 그냥 ‘참는다’. 이거 엄청나게 고통스럽다. 하는 일에 집중도 안되고. 그래서 몇 번은 놔두고 화장실을 간 적도 있긴 한데, 화장실이 다른 층에 있거나 하면 그것도 쉽지가 않다. 화장실에서 일을 해결하는 내내 불안함에 떨어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층까지 가냐.

 예전엔 이런 경험도 했었다. 카페마다 있는 1인석(옆으로 주루룩 앉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고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화장실이 급했나 보다. 음악 들으면서 신나게 뭔가 하고 있던 나를 툭툭 치더니 자기 노트북을 잠깐 봐줄수 있냐고 물어본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 했고 그 사람은 화장실을 다녀왔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날 어떻게 믿고 나에게 노트북을 봐달라고 한 것일까. 내가 도둑놈이라면, 도리어 나에게 맡긴다고 부탁을 하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아무튼 생판 모르는 옆사람에게 놋북을 맡기는 것도 꽤 신선(?)한 아이디어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걸 실행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일어서고 말지.

 아무튼 이래저래 혼자 놋북들고 카페와서 화장실 가는 건 고역이다. 그렇다고 안 가면 하는 일에 집중이 안 되니 앉아있으나 마나다. 집중력을 생각하면 패기있게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와야겠지만, 내 소중한 놋북(+다른 물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가 없다. 이게 참 설상가상인게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면 거의 매번 화장실이 땡긴단 말이지. 근데 혼자서 카페는 자주 오고. 이렇게 이 딜레마의 상황은 엄청나게 자주 찾아오는데, 아직도 확실한 해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놋북을 놓고 가야 하는가. 참아야 하는가.

근데, 확실히 화장실이 아이디어의 보고(寶庫)인 것 같긴 하다. 방금까지 카페에 앉아 글 두개를 썼다가 마음에 안들어 지웠는데, 짐을 싸서(갈려고) 화장실에 간 순간 글감이 떠올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역시 아이디어가 안 떠오를땐 화장실이 특효약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