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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딜레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아, 이거 시험만 아니면 참 재미있게 볼 수 있을텐데’란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시험을 안 보면 공부를 안 할 거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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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요즘은 ‘퇴근’ 할 일이 없다보니 퇴근길을 경험한 지도 오래 되었다. 뭐 학기중에야 학교 안에만 있으니 퇴근의 개념이 없고(그나마 학교 안에서는 어디 있든 10분 이내에 귀가할 수 있다), 방학 중에도 대부분의 일정이 명동 안에서 소화되니 저녁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돌아올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요근래 이런저런 일들과 약속들 때문에 멀리 나갔다가(그래봤자 서울 안이지만) 저녁쯤 귀가하는 일이 몇 번 생겼다. 8월 중순까지 워낙에 바빴던 터라 약속이 몰렸는데, 덕분에 연일 약속이 잡히는 통에 마치 예전에 회사 다니던 것처럼 ‘퇴근’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거 며칠 했다고 퇴근 운운 하는건 좀 오바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퇴근 비슷한 것들을 하다 보니 예전 생각도 나고 그러더라.

 (알바를 포함해) 일이란 걸 처음 해 본 게 대학교 1학년 마치고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퇴근에 대한 첫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였을게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뿐더러, 동네에서 일을 한 거라 퇴근길이라는 느낌도 별로 안 들었다. 그 후에도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주유소는 역시 동네였고 편의점은 남들 다 출근할 때 퇴근하던 기억 때문에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퇴근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퇴근길’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첫 기억은 2006년 코엑스에서 알바하던 때인 것 같다. 그땐 오전조를 하면 오후 6시에 퇴근, 오후조를 하면 오후 10시 좀 넘어서 퇴근을 했으니 직장인 퇴근 시간과 비슷했다,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 역시 직장인들이 많은 삼성동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직장인스러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퇴근을 하면서, 나는 그때부터 직장인의 퇴근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뭐 퇴근길이 별 거 있겠냐만,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서 고단한 몸으로 집에 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동과는 구분되는 퇴근길만의 감정상태가 형성되는 것 같다. 거기다가 해가 뉘엿뉘엿 져 가거나 아예 밤이 된 상황, 혹은 아예 하루가 끝나버린 늦은 밤시간에 버스에 타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퇴근길은 참으로 감성적이다. 어떨 때엔 이미 술한잔을 걸친 말랑말랑한 감정 상태이기도 하고, 어떨 때엔 또 녹초가 되어 이어폰에서 무슨 노래가 나오는지도 모르는(심지어는 노래도 안 틀고 이어폰만 꽂고 집에 온 적도 있다)멍한 상태일 때도 있다. 뭐 이런저런 차이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퇴근길은 감정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퇴근이란 게 막 펄쩍펄쩍 뛰고 그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경우에는 유난히 푹 가라앉아서 퇴근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보면 퇴근길에 야구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신명나게(?) 집에 가는 것 같던데, 나는 그런 건 거의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 들으면서 집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 말고는 뭐 트위터 정도? 트위터도 버스를 탈 땐 잘 안하고(멀미가 났다), 지하철로 집에 가는 경우에나 가끔 하곤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약간은 멍한 상태로 버스 좌석에 널부러진 모습. 그게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 뭐 엄청 신나거나 그런 거 없이 음악 좀 들으면서 집에 가니, 자연스럽게 감성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내가 퇴근길에 감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 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건 아까 이야기했던 아주 예전의 퇴근길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나 기억이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땐 집에 가면 누가 있었거든. 근데 코엑스에서 알바하던 때부턴,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자취를 했었으니. 당시에는 아무 느낌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돌이켜 보니 집에 가면서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혹은 회식자리에서 왁자지껄 하다가도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는 것. 그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썩 좋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집이 적막한 게 싫어서 집에 들어가면 티비부터 켰었으니, 그런 ‘아무도 없는 집’에서의 영향이 알게모르게 꽤 있었나 보다.

 아무튼 그래서 퇴근길은 참 감성적이었다. 글감도 막 떠올랐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막 떠올랐다. 뭐 물론 집에 가면 글감이고 뭐고 널부러져서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가 잠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래서 그 감성과 사색의 시간이 결코 생산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시간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독특한 느낌을 가진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어쩌면 평생 그런 퇴근길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된 처지에서, 그때 느꼈던 퇴근길 특유의 느낌은 참 아련하게 다가온다. 난 또 이런 감정을 언제 느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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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기 전에 한 인간

본당에서 드리는 새벽 미사에는 장애인들이 몇 분 오신다.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인데, 두 분은 목발을 짚고 오시는 분이고 한 분은 아예 휠체어에 앉아 계신 분이다(이분은 뇌성마비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엔 성당 뒷쪽에 앉아 계셔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영성체할 때는 제대 앞으로 나와야 하니 그때 자주 마주치게 된다.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라 앞으로 나오는 속도나 영성체하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느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목발을 사용하시는 두 분은 나름대로의 스킬(?)이 있어서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영성체를 하고 들어가신다. 다만 휠체어에 앉아계신 분은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 앞까지 와서 영성체를 할 수가 없어서(영성체하는 위치 바로 앞에 턱이 하나 있다) 맨 마지막에 나와서 영성체를 하고 나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영성체 행렬이 지체되지는 않는다.

 그분들을 보고 있는 건 참 흥미롭다. 구경거리처럼 느낀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깨 주기 때문이다. 으레 우리는 장애인들을 만나면, 뭔가 배려가 필요한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배려나 양보가 필요할 때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성체를 하시는 그 분들을 보면, 그들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목발을 짚고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불편한 점이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사용하며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놓고 앉아 남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장애인들을 하나같이 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오히려 선의를 가진 이들에게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아예 관심이 없으니까). 물론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미사에 오시는 그분들처럼 알아서 잘 살아가는 분들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이들까지도 도매금으로 묶어 취급하는 건 평범한 이들과 같이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분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란 생각이 든다.

 모든 장애인들을 동정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생각하는 건 어쩌면 외형적으로 멀쩡(?)한 나에 비해 그들을 아래로 보는 시각의 반영이 아닐까. 충족된 이(나)와 부족한 이들(장애인)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 전체를 ‘장애인’이라는 지나치게 큰 카테고리로 범주화시켜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그들을 각자의 개성을 지닌 개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라는 몰개성적인 이미지로 퉁쳐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막 들기 시작한다. 장애도 그 사람의 한 개성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나도 겉모습만 멀쩡하다 뿐이지 수많은 하자(?)를 갖고 있는 인간인데, 그들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결점들 중 특별히 외형적인 결점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그들을 ‘장애인’이라는 무식하게 큰 카테고리로 퉁쳐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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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위기

 일반적으로 살아온 내 나이 또래, 혹은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의 입장에서 ‘굶어 죽을 판’이란 말을 피부로 느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다들 태어나면서부터 대학교 졸업 때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쭉 부모 세대의 지원과 보호 안에서 살아가게 되며 덕분에 술값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신 적은 있어도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생존위협을 느낀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어디까지나 대학 졸업해서 직장 취직하는 ‘일반적인’케이스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생에 딱 한 차례 생계비 문제로 ‘생존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

 2007년,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을 한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래 거창한 ‘미국 어학연수’ 계획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어버린 후, 졸업 후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 전공 특성상 서울 정착자금을 번다는 명목으로 장기간 모 문구유통점의 ‘용역사원’으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알바’를 하던 1년간의 생활은 썩 사정이 좋지 못했다. 어차피 알바 월급이란 것이 거기서 거기인지라(그래도 낮에 일하는 알바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소득 자체가 넉넉지 못했고, 또한 알바의 목적 자체가 당장의 생존보다는 졸업 후 서울 정착을 위한 돈벌이의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만큼 돈을 모아 놔야 했다. 내 경우 집에서의 지원은 전무했고(지원이 있었으면 애당초 알바를 하는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터라 당장 거처부터가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초반엔 친구 집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하던 곳이 코엑스였기 때문에,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 하에 인근의 고시원을 알아보았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기본적으로 다른 동네보다 월세가 5~10만원가량 비쌌는데, 어차피 다른 동네에서 출퇴근하면서 교통비 쓰는 것을 감안하면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는 계산 하에 대치동(!)의 30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거지 마련에 30만원이라는 거금을 매달 들이붓게 된 상황에서, 생활은 당연히 극도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비싼 강남에서 일하다 보니 식비가 큰 부담이었는데, 한 끼에 5천~7천원씩 30일이면 벌써 식비만 50만원이었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쳐도 30만원인데, 거기다가 가끔 술 한잔씩 하고 필요한 물건(혼자 살면 생각보다 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많다) 사고 하면 돈 모으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는 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단 식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처음엔 도시락을 싸 오는 다른 동료에게 빌붙으면서 식사를 해결했는데, 고시원에서 ‘밥’은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 밥을 싸 온 다음 구색용으로 통조림이나 김을 챙겨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다른 분들이 양해를 해 주었기에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굉장히 염치없는 짓이긴 했다. 그렇게 좀 살다가, 이마저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렵게 되자 편의점 음식으로 한끼를 때우면서 생활을 해야 했다. 라면에 삼각김밥이면 밥집에서 사먹는 식비의 절반 정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먹고 힘쓰면서 일했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고생하면서 알바를 1여 년간 한 덕분에 나는 반지하이긴 하지만 내 세간살림이 들어찬 월셋방을 가질 수도 있었고, 약 600만원을 모은 상태로 마지막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1년 일해서 600만원 모은 게 별로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알바로 모은 돈이었다는 점과 위에서 언급한 모든 생활비를 매달 지출해가면서 모은 것을 감안해볼 때 내 입장에서는 ‘영혼까지 다 끌어 모았다’ 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 생활비 명목으로 추가대출을 받은 100만원까지. 이만하면 졸업준비는 다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아, 중간에 두어 차례 친구가 다니던 영상 프로덕션의 조연출을 하며 3~4일 정도 일당을 받긴 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기적인 수입을 1원도 올리지 못했다.

 이 무소득의 타격은 생각보다 컸다. 일단 내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월세는 꼬박꼬박 계속 나갔다. 몇 달 월세를 내지 않기도 했지만 바로 윗층에 집주인이 살고 있는 처지에 몇 달이고 버티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식비도 계속 나갔다. 집이 생겨 취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는 해도 변변찮은 반찬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상황에 매일 맨밥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도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한참 쪼들리던 때 밑반찬에만 먹는 밥이 지겨워서 일주일에 한번 중국집에서 ‘탕볶밥’을 시켜먹던 기억이 나는데, 무슨 요일 이벤트라고 해서 볶음밥 가격에 탕볶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복학 후 2년 반 동안의 학자금 대출의 상환기한이 돌아오고 있었다. 원래는 4학년 2학기를 마치면서 취업을 하게 되면 갚기로 되어 있던 것들이었는데, 1년을 휴학하다 보니 취업 후가 아니라 학기 중에 상환기한이 닥쳐 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그나마)감당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곧 6개월 단위로 상환금액이 두 배씩 불어났다.

 이런 불가피한 문제 이외에도, 무소득이라는 환경에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을 그만두니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할 때엔 의외로 돈을 잘 쓰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데다 근무중의 음료 같은 것도 내가 사는 것보다 내 위의 정직원들이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오후 조를 하면 밤 10시에 끝나는 스케줄 덕분에 술 마실 시간이 되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어서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고시원에 사니 어지간한 살림은 늘릴래야 늘릴 수도 없었으니 컴퓨터나 전자제품 따위에 돈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을 딱 관두고 학교에 다니니 돈을 쓸 일도, 돈을 쓸 시간도 풍부해져 버렸다. 1주일에 이틀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이제는 세종시가 된)충남 조치원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교통비가 들었다. 거기다가 이틀이기 때문에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필수적으로) 술값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또 4학년이니 음료나 군것질거리를 사줄 사람은커녕 내가 사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약 3~4개월 학교를 다니면서 엄청나게 돈을 썼다.

 학기가 끝났다고 해서 돈 쓸 곳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말 그대로 ‘백수’였기 때문에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다. 내 집이라고는 하지만 환경이 썩 좋지 않은 방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처박혀 있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계속 어딘가는 쏘다녀야 했고, 계속 지출이 발생했다. 그리고 백수 초기만 해도 잔고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쓰고 다녔다. 그 결과 나는 ‘채워지지 않는 잔고’ 에 대한 두려움을 그 때 알게 되었다. 사실 뭐 그전에 용돈 받아서 살던 시절에는 잔고가 바닥나도 걱정이 없었다. 거처와 식사는 선불 완납된 기숙사에서 해결 가능했고, 전화 한 통으로 돈이 ‘충전’ 되던 시절이었으니.

 백수로 살던 시절의 지출은 돈을 한참 벌어봤던 지금 입장에서 보면 참 소박하긴 했다. 역시 밑반찬 위주의 식단에 질려 가끔 시켜먹던 중국집, 가끔 술, 그리고 가끔 예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가게 되면서 쓰는 교통비와 간단한 지출, 무슨 공짜 강좌 따위에 참석하거나 취업 때문에 면접 같은 곳에 나타나는 교통비나 식비, 온라인 게임 1개월 정액요금 등… 지금 생각하면 어디다가 돈을 썼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돈은 깨알같이 빠져나갔다. 한참 돈이 쪼들리던 시절에는 뜬금없이 등산을 하러 동네 뒷산(그래도 해발 600m나 하더라)에 올라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7만원짜리 자전거를 사서 한강 자전거도로를 쓸고 다니는 짓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 7만원짜리 자전거를 거의 3달 가량 매일 끌고 나가 돌아다니면서 시간 죽이기와 이동을 해결하고 다녔으니 훌륭하게 제 값을 해낸 기특한 자전거였다. 물론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말 그대로 쇳덩어리 자전거라서 오로지 평지만을 달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보니 굉장히 유쾌하게 그 시기를 회상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유쾌한 시기는 아니었다. 내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엔 필름 살 돈이 없어서 한컷 찍는 데 온갖 고민을 했던 때이니 말이다(36컷 필름이 한 통에 싸게 사서 1~2천원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잔고의 압박이 다가오는데 일을 할 수 없는 괴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대한민국의 취업시장에 대해 대학 시절부터 근거 없는 지나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이 닥쳐오니 대한민국에서 대졸자로 취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몸소 깨달아야만 했다. 전공이 광고기획인지라 기업 마케팅 부서나 광고대행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처음엔 겁도 없이 기업 마케팅 부서를 두드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야말로 솔직한 서류에, 솔직한 학점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자기소개서(그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로는 서류심사 문턱조차 넘기 힘들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행사 쪽은 죽어도 가기 싫었다. 결국은 애꿎은 내 청춘의 시간들만 잔고와 함께 계속 소모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르바이트도 그 시점에서는 하기가 힘들었다. 취업준비생이란 신분의 특성 때문이었다. 방학중이나 휴학중에는 내가 굳이 일을 만들지 않으면 스케줄이 없으니 하루의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점유하는 알바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취업준비기간에는 그게 힘들다. 어쩌다가 서류 붙어서 면접이라도 오라고 할 때에 알바를 하고 있으면 면접 참석에 지장이 생긴다. 알바 입장에서 입사면접이 있으니 오늘 하루 빼 달라는 소리는 나를 빨리 잘라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지라(물론 오래 일한 입장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섣불리 알바를 구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또 취업준비생이라는 입장은 고용주 입장에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취업준비생이란 건 말 그대로 취업이 되면 언제든지 사라져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거의 모든 알바구인 글에 ‘장기근무 가능자 우대’ 란 말이 씌어져 있는 상황에서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취업준비생이 그럴 듯한 알바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맞게 된 2008년 5월.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에 치달아 있었다. 잔고는 오늘내일을 바라보고 있었고, 위기감에 구해본 몇 군데의 알바자리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말았다(키 작은 게 그때처럼 한스러운 적이 없었다). 버스비조차 부담되는 상황이 되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 이외의 외출은 불가능해졌고, 당연히 온라인게임 정액요금도 낼 수가 없었다. 취직한 친구들 덕분에 하루짜리 알바 같은 걸 몇 개 할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 결국 나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김영삼 정부의 심정으로 집에 구원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IMF와는 달리 우리 집엔 나를 구제해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없었다. 집에서 돈이 왔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왔더라도 (부모님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큰 도움은 안 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잔고위기의 상황…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반지하 방에 앉아서 맞이하는 이 절박한 상황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매일 인터넷 뱅킹을 열어 잔고로 버틸 수 있는 기한을 계산하고,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의 잔량을 확인했다. 내다 팔 물건이 없나도 확인해 보았지만, 내다 팔 만큼, 그리고 내다 팔아서 만족할 만큼 돈을 받을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 시간이 지난 후 근처 친구 집에 가 밥과 술을 얻어먹고, 자전거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 즈음 위기감이 고조된 나는 결국 기업 마케팅팀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대행사 쪽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행사 업계라지만 아무 관련경력도, 공모전 수상경력도 없는 신입인력을 덥석 낚아갈 회사는 흔치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닥을 보이는 잔고에 위기감을 느끼고, 답장 없는 지원메일에 좌절하면서 5월을 보내고 있었다.

 6개월을 기다린 반가운 소식은 얄밉게도 한꺼번에 찾아왔다. 먼저 훌륭한 알바 자리. 친구네 회사에서 재택으로 업무를 해 줄 인력을 구하는데, 그곳에 연락이 닿았다. 대학교 동기이니 면접 따위는 가볍게 넘어갔고, 사무실에서 업무 브리핑을 받은 후 다음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알바자리였지만 수개월 동안 거듭되는 탈락과 거절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성공’이었다. 이 작은 성공 덕분에 얻은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머금고 알바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로비를 나서는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뭐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 전화는 몇 군데 이력서를 넣은 대행사 중 한 군데에서 온 전화였고 그렇게도 내가 기다리던,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 전화였다.

 그 전화를 끊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통화내용은 당시에 너무 어안이 벙벙했던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오피스 빌딩에서, 구직에 성공하고 회전문을 나서자 마자,  정규직 합격 통보를 받은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이란… 정말 그렇게나 날씨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5월의 하늘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빌딩 앞의 광장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펄쩍펄쩍 뛸 뻔 했다.

 합격 통보의 흥분이 가라앉자, 사소한 문제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인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던 알바자리 역시 다음주부터 시작이었던 것. 물론 취직한 마당에 그런게 대수겠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의 큰 ‘성공’ 때문에 작은 성공을 안겨준 사람에게 죄송한 소리를 해야 했고 더군다나 그 대상은 안면이 있는 대학교 동기였다.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이런 좋은 소식이 겹친 것이 아주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인생에 잠깐이지만 심각하게 닥쳐왔던 생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제 비로소 스스로 벌어서 스스로 먹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겹친 또 하나의 작은 행운이라면, 월급날이 애매하게 걸려서 입사한지 불과 보름여만에 (완전한 1개월 액수는 아니지만)첫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오늘내일 하던 차에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나에게는 굉장히 큰 기쁨으로 다가왔었다.

 지금이야 굶어죽을 걱정 없고, 내가 노력하면 잔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속 편한 처지가 되어 살고 있다. 거기다가 전혀 월세걱정 없는 주거공간도 갖추고 있으니 그때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옛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 나는 참 절박했었지란 생각과 함께 그 (남들이 보기엔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를)위기를 어찌어찌 이겨내며 살았던 그 시절의 나에 대한 대견함을 느낀다. 이젠 평생 그럴 일이 없겠지만, 때때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작은 좌절에 밀어넣을 때면 항상 그 좌절의 시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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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글, 써야 하는 글

학교를 다니다 보면, 또 일을 하다 보면 글을 써야 할 일이 수도 없이 생긴다. 나는 글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다지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써야 하는 글’을 쓰는 건 꽤 고단한 일인 것 같다.

어떨 땐 ‘복붙’으로 손쉽게 레포트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성격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나는 ‘복붙’을 정말 못한다. 어디에서 인용을 해 와도 꼭 내 식대로 손을 봐야만 적성이 풀린다. 그렇게 붙여넣기한 글에 공을 들이고 있노라면 어느새 복붙의 효율성은 사라져 버리고, 히려 내가 직접 쓰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비효율로 치닫고 만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거 참 까다롭게 군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무튼 난 도저히 복붙은 성격상 못하겠다.

그러다보니, 결국 대부분의 ‘써야 하는 글’은 직접 다 쓰게 된다. 하지만 직접 쓰는 일도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당최 뭘 알아야 쓰지. 글이란 게 머릿속에 있는 걸 차곡차곡 풀어내는 건데 머릿속에 들어있지도 않은 걸 내 말로 풀어내자니 이거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썰’이 되고 만다. 누구는 썰 푸는 것을 대단한 재능으로 생각하던데 알고보면 이것도 상당히 괴로울 일이다. 썰이란 게 사실 잘 모르는 걸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건데 이게 참 쓰는 입장에서도 사기치는 것 같아 영 껄적지근하고 또 (나보다 잘 알 것이 뻔한) ‘독자’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가소로울지를 생각하면 참 면구스럽고 창피한 노릇이다. 참 이게 그래서 ‘써야 하는 글’을 억지로 쓰는 입장은 참 이래저래 곤혹스럽다.

그렇다면 써야 하는 글 말고 ‘쓰고 싶은 글’은 어떤가? 쓰고 싶은 글은 말 그대로 참 쓰고 싶은데, 또 이게 난감한 일인게 쓰고 싶은 글은 대개 ‘시간이 없어서’ 못 쓴다. 쓰고 싶은 글이란 게 대부분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 안되는 무익한 글들인데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데드라인이 목전에 닥친 ‘써야 할 글들’에 우선순위가 한참 밀리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이건 또 참 아이러니한 일인데, 쓰고 싶은 글감은 꼭 그걸 글로 옮기기 어려운 타이밍에 떠오른다. 그렇다고 그걸 나중에 쓰려고 메모를 해 놓고 나중에 쓰려고 보면, 글감이 떠오르던 그 순간의 그 ‘딱’ 하는 느낌이 도저히 살아나지가 않는다. 결국은 쓰려고 마음먹었던 글감만 수북히 쌓이고, 그게 진짜 한 편의 글이 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튼 이래저래 글쓰는 건 어려운 일인 데다가 이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에, ‘쓰고 싶은 글’을 쓰려고 장만한 이 수백 페이지짜리 노트는 아직까지도 거의 텅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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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이 자꾸 사라진다

이래저래 글쓰는걸 좋아하는 인간이라 인터넷에 원없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는
참 여기저기다가 글을 많이 써댔다.
물론 뭐 그런 글들의 9할이 잡담이나 별 영양가없는 글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거 쓰면서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또 무엇보다도 나~중에 봤을 때 그땐 그랬었지 하고 웃을 수 있는
자잘자잘한 기억을 남긴다는 점에서 그런 무익한 잡담조차도 써갈기는 의미가
있는 것 같긴 하다.

근데,
문제는 글이 자꾸 사라진다.
예~~~~~~전 2001년에 다음에 ‘칼럼’이란 서비스가 있었는데
(지금 보면 블로그 같은 거다. 정기적으로 발행일마다 글을 쓰면 구독자에게 알람이 감)
거기다가 한달여 정도 ‘겜방알바가 본 세상’ 뭐 이따위 글을 연재했었다.
히트를 친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구독자도 수십명 선에
피드백도 활발한 신나는 공간이었다.
알바를 그만두면서 연재도 그만두게 되었었는데,
중요한 건 그때 써놨던 글들이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거다.
다음 칼럼 서비스는 오래 지나지 않아 서비스가 종료되었는데,
그때야 뭐 백업에 대한 개념조차 없을 때이니 당연히 글은 거기에밖에 없었다.
근데 서비스 종료 하면서 글이 다 날라갔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라 그 글을 어떻게 받아올 수도 없었고
(지금과는 달리 그때엔 군대에 인터넷 금지였다)
심지어는 서비스가 종료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렇게 나름대로 핫(?)했던 내 글들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싸이월드니 이글루스니 네이버 블로그니
수많은 글쓰는 서비스들에 개소리를 지껄여 놨었다.
그 중 상당수는 내가 직접 삭제를 하기도 했고
서비스가 종료되어 사라지기도 했으며
(백업해놓은것도 있다. 근데 백업해놓으면 잘 안보게 됨)
내가 이제 더 이상 그 서비스를 안 써서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지만
어쩌다가 아웃링크를 타고 가다가 발견되거나
구글 검색에 걸리는 그런 글들이 있다.

이렇게 글이 사라지는 게 너무 아쉽다.
이게 노트에 써놓았으면 어떻게라도 보관했을텐데,
(라고 말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때 썼던 노트는 100% 사라졌다)
인터넷에 써갈겨놨다가 어딘가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져버리는 글들이 참 아깝다.

그 글들이, 남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개소리일 지라도
나에게는 참 소중한 내 새끼들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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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으로 살아왔다는 것

내가 첫 직장에 들어간 2008년부터 4년이 넘는 시간 나는 직장인으로써 살아왔다. 그러다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해서 학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는데, 여기서 이제 막 스무 살 남짓 된 친구들과 부대껴서 살다 보면 내가 나이차이로 인한 세대차이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살아왔던 직업이나 환경적으로도 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친구들과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는 꽤 오랜 기간 인터넷업계에 있으면서 온라인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어린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이용하는 분위기들을 보면 나랑은 코드가 약간 다른 것을 느낀다. 분명 내가 고리타분하게 인터넷 문화를 ‘배워서’ 향유하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들이 하던 짓(?)을 나도 분명히 해왔었는데 뭔가 다른 이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것들이 느껴져서 격차를 느끼곤 한다.
그런 차이들을 느끼다 보니, 결코 길지 않게 경험한 직장생활이란 게 나를 굉장히 크게 바꾸어놓았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물론 4년여간의 시간을 짧다고만 표현할 수는 없지만, 4년된 5년차 정도면 아직 초년생 취급을 벗을 만한 연차는 아니긴 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직장생활이었음에도, 그 전에 20여년간을 ‘돈 쓰는’ 사람으로 살아오다가 ‘돈 버는’ 사람으로 바뀌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이 상당했던 것 같다.
‘돈 버는 사람’으로써 살아오면서 가장 크게 변했던 건 역시 돈에 대한 가치인식의 변화였던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돈 버는 사람이 아님에도 예전 돈 벌던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잔돈을 잘 챙기지 않거나, 아주 비싸지 않은 물품을 부담 없이 생각해 계속 ‘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월급을 받던 시절에는 이 정도를 지출해도 곧 다시 수입이 발생해서 채워주지만, 지금은 정기적인 수입 없이 쌓아놓은 돈만으로 생활하는 처지라서, 무의미한 구매를 줄여야 하는 처지인데도 그런 것들이 쉽지가 않다. 좋게 이야기하면 ‘통이 커진’ 건데, 앞으로도 한참 수입이 없을 형편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경우가 있다.
또 한 가지 변했던 건 내가 돈 안되는 일, 취미생활에 소홀했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인터넷에서 쓰던 별명이 ‘헛짓꺼리’ 였을 정도로 쓸데없는 일이나 취미로 즐기는 일들에 심취했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것을 한참 향유하다가 온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런 분야에 대한 내 지식이 보잘것없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젊은 친구들이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나 삼촌뻘 되는 사람들이 이야기에 잘 끼어들지 못하고 멀뚱멀뚱해 있는 것마냥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지식이 없다. 이건 내가 그 동안 그런 것들을 잘 하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다 보니 잊어버리고 만 것들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분명히 예전엔 줄줄 외고 다녔었던 것들인데,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들이 많다.
그러고 보면 4년간 너무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해서 살았었다. 그게 싫어서 중간중간 회사를 관두고 자유인처럼 살려고도 했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일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회사에 있으면 뭔가 자유롭게 일을 하긴 하지만 매여 있는 몸이라 다른 것들에 신경 쓰거나 즐길 여유가 없었고, 야근이나 휴일근무 이외에도 사람 만나고 일 이야기 하고 하다 보면 예전처럼 집구석에서 게임이나 하고 애니메이션이나 보면서 쉬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니 기가 막히지만, 이제 슬슬 나도 인생무상이니 하는 소리를 지껄일 때가 된 것 같다. 그때 그렇게 열정적으로 챙겨보고, 레벨업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몰두했던 그것들이 이제 이야기도 꺼내지 못할 정도로 기억 저편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니 좀 허무하기도 하고 회한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당시에 즐겁게 즐겼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겠지 하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너무 ‘멋있는 비즈니스맨’ 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살았었던 것 같기도 해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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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경 첫경험

내가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는 사실은 검진 당일 안내데스크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건강검진 패키지에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위장조영검사/위내시경(일반)/위내시경(수면) 셋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위장조영검사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좀 귀찮아 보여서(계속 지시에 따라 몸을 굴려야 하는 거라고), 내시경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또 수면내시경은 추가비용이 든다고 했다. 일반내시경에 대한 경험담을 예전에 들었던 터라 추가비용을 부담하고 수면내시경을 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요새 재정상태도 말이 아닌데다가 까짓거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들겠나 싶어 그냥 일반내시경을 선택했다. 일단 한 번 해 보고 도저히 못하겠다 싶으면 다음부터 수면내시경 하면 되지 뭐 이런 생각으로…

 내시경 검사는 건강검진의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대기자가 많이 밀려 있어 나는 내시경실 바깥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옆에 비치되어 있는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관심 가는 책들이 있었지만 어차피 진득하게 앉아서 볼 것은 아니니 만화를 선택했다. 이원복 교수의 베스트셀러 . 어렸을 때 대사를 외울 정도로 자주 읽었던 책이지만(이원복 교수가 지독한 보수주의자란건 크고 나서야 알았다) 별달리 대안도 없었고 읽은지도 오래 되었고 해서 시간때우기 용으로 책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니, 생각보다 빨리 내 차례가 왔다. 나는 호명을 받고 내시경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쪽에도 다섯명 정도가 안락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한 자리를 잡고 이번에는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검사실 안쪽에는 책이 없었다). 무슨 이름모를 연예인 부부가 장을 보는 시시콜콜한 아침 프로를 별생각 없이 멍하니 보고 있으니 간호사가 와서 인사를 했다. 짤막하게 위내시경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데 ‘많이 힘드실 겁니다’ 란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원래는 아픈 것도 안아프다고 이야기하는게 병원 아니었던가? 근데 간호사가 직접 콕 찍어서 많이 힘들 거라니, 그럼 진짜 얼마나 힘든건가 싶었다. 하지만 나의 심적 동요와는 관계없이 간호사는 약물 복용여부를 확인하더니 겔포스 같은 약을 하나 건넸다. 위에 있는 거품을 없애주는 약이란다. 맛은 겔포스보다 훨씬 훌륭했다. 하나 더 먹을 수 있었으면 하나 더 먹었을지도. 암튼 그 약을 먹고 나는 다시 안락의자에 기대 앉아 아침프로를 보기 시작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안쪽 방에서 수술복 같은 앞치마를 두른 간호사가 나오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따라 들어갔더니 안에 내시경 검사실이 4~5개 있는 것이 보였다. 조명도 환하지 않아서 뭔가 본격적인 수술실의 느낌이 풍겼다. 1번 검사실로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고 들어가니 나를 인솔해서 들어온 간호사가 뒤따라 들어오며 목마취를 하겠다고 한다. 목마취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아주 오래 전 포경수술의 기억이 떠올랐다. 포경수술이란 게 생살을 가위로 잘라내는 것이다 보니 수술 시 국소마취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 그 중요부위(?) 에다가 직접 마취주사를 놓았던 것이 기억나자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모가지에 주사바늘을 꽂는 것인가! 긴장하고 있으려니까 간호사가 무슨 손소독제 같은 걸 들고 오더니 입을 크게 벌리라고 한다. 입을 크게 벌리며 아, 주사가 아닌건가! 역시 현대의학의 발전은 놀랍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간호사가 손소독제 같은 걸 목구멍 속으로 칙 뿌리며 꼴깍 삼키라고 한다. 나는 있는 힘껏 꼴깍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그러자 곧 입속 깊은 곳에서부터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뭐랄까, 마취가 되면서 마취되지 않은 부분이 마취되는 부분에 닿는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생전 처음으로 ‘목구멍의 촉각’ 을 느끼고 있으니 그 설명하기 힘든 감각이 입 속 깊은곳부터 목 중간쯤까지 확 퍼져나갔다. 마취를 했는데 감각이 있으니 오히려 더 이상했다. 아니면 이 감각은 마취되지 않은 부분이 느끼는 감각인 건가. 이 생경한 느낌을 즐기고(?) 있으니, 마우스피스 같은 걸 가져와서는 입에다가 물려준다. 드디어 본게임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마우스피스를 입에 문 나는 지시에 따라 검사대에 옆으로 누웠다.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당겨 추운 겨울 지하철역 노숙자같은 모양새로 몸을 웅크렸다. 그러고 있으니 시술자로 추정되는 여성분이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내가 검진을 받은 검진센터 안에는 남자가 딱 두 명 있었다. 비뇨기과 검사를 맡은 의사와 안내직원 한 명.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다. 처음엔 직원들이 여자들 뿐이라 좀 의아했는데 생각해 보니 검사하면서 배도 내놓고 하는데 남자가 하면  검진받는 여자들이 불쾌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시술하는 의사(?)가 간단하게 내시경 검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시간은 3분 정도, 식도에서부터 위 여기저기를 내시경이 훓고 다니기 때문에 많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여기에서도 강조한다. 얼마나 고통스럽길래), 내시경이 계속 공기를 불어넣기 때문에 트림이 계속 나올 것이다, 숨은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어라 따위의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준비를 위해 다시 잠깐 자리를 비웠다.

 주의사항까지 다 듣고 침대에 누워 있으니, 내 머리맡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매달려 있는 내시경 카메라가 찍은 영상과 가볍게 흔들리고 있는 내시경 장비가 보였다. 저 시커먼 게 내 목구멍 속으로 들어온다는 거지. 조금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무덤덤했다.

 곧 의사가 검은 물체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내시경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저것도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거겠지. 장비를 교체하고, 의사의 손에 의학드라마에서 자주 봐서 익숙한 물체가 들려졌다. 그리고는 “이제 시작합니다” 란 말과 함께 그 검은 물체가 내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왔다.

 뭔가 거대한 이물질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느낌이 나며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구역질을 참아보라는데 이게 참으려고 한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었다. 쉴 새 없이 구역질과 트림을 하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으니 어느 순간 구역질이 잦아들었다. 이제 위에 도착한건가. 의사가 계속 지금 내시경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건 들었는데 전혀 머릿속에서 인식을 하지 못했다. 조금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거대한 물건이 내 목구멍 속에 걸려 있는 것이었고 참을 수 없이 거북했다. 입을 다물 수가 없기 때문에 침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너무 구역질과 트림을 해 대는 통에 눈에서는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처참한 장면이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걸 느낄 정신조차 없었다.

 잠깐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길게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정말 ‘찰나’ 였다). 이내 내시경이 내 소화기관을 다시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고, 눈물나도록 괴로운 구역질도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호흡을 조절해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쉬라’ 는 지시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것조차 생각만큼 쉽게 되는 게 아니었다. 시작한지 3분은 이미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술자 의사는 계속해서 현재 내시경 위치에 대해 설명하며 잘하고 있다 곧 끝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한국사람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믿기 힘든 게 곧 끝난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이 지옥같은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하늘에 한 줄기 빛 같은 의사의 한마디가 들렸다.

 “자, 이제 나옵니다. 목 넘어갈때 힘듭니다~“

 나는 용이 트림을 하듯이 우렁찬 구역질과 함께 마침내 그 역겨운 물체를 목구멍 속에서 뱉어내었다. 마우스피스를 빼고 나니 입 주위부터 침대 아래까지 침범벅이었다. 간호사가 친절하게 휴지를 몇 장 가져다 주었지만 그걸로는 입 주변을 닦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옆에 준비된 세면대에서 입을 한참 게워냈는데, 침이 있는 대로 끈적해져 있어(오랜 시간 입을 벌리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침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와중에 의사는 나보고 굉장히 잘 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몰골로 칭찬이라니.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의사가 설명을 위해 모니터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도 내시경 검사 결과는 깨끗했다. 설명을 해 주면서 내시경 기계로 촬영한 내장 사진을 보여주는데 정말 연분홍빛으로 빛나는 나의 내장은 섹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내장이 섹시하다… 뭐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설명이 끝나고, 다시 간호사의 인솔로 검사실 밖으로 나와 안내를 받았다. 마취가 지속되는 30분동안 물을 포함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당일에는 자극적인 음식과 음주, 흡연을 피하라고 했다.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은데 30분이나 물을 마실 수 없다니 절망감이 밀려왔다(이미 내시경 검사 전 12시간이나 물 한 모금 먹지 못했었다). 그래도 끝났다는 행복감에,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직도 감각이 이상한 목덜미를 부여잡고 내시경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