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를 까먹었는데, 예전에 페이스북인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맞벌이 부부인데, 아내가 직장의 조직문화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 근데 그게 남편 입장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아내가 남편을 부러워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남자들은 그런걸 이미 군대에서 배워 오니 좋겠다’는 거다. 군대문화에서 이어지는 조직문화에 익숙치 않은 여자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내용의 디테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이마를 탁 쳤다. 그 글 속의 대화에 우리나라 조직문화의 불합리가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초등학교때부터 지금 다니는 학교까지 몇 군데의 조직을 경험해본 결과, 우리나라 조직에는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 따르면 무리 없이 조직생활이 가능한, 1인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우리나라 조직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뭐 전세계의 어떤 조직이 입만 벌리고 앉아 있는데 알아서 다 챙겨주긴 하겠냐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우리나라의 조직은 심각한 수준이다.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말하자면 조직 안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의 상당수를 ‘눈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에 출근하는데,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신입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 것일까. 경험치가 있는 사람들이야 으레 9시가 출근시간이려니 하겠지만, 신입이라면 그런 걸 몰라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9시에 오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출근시간은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문제인 경우다. 우리나라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칼같이 정시출근하는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분명히 9시 출근인데 8시 59분에 들어오면 아마 좋은 소리 들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그건 메뉴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8시까지 안오면 눈치보이고, 괜히 일찍 가야 할 것 같고 하는게 다 그 눈치에 의해 시스템이 굴러가기 때문인 거다.
규칙을 칼같이 지키면 얍삽한 사람이 되고, 눈치껏 더 해야 하는 조직. 그런 조직은 진입장벽이 높다. ‘아무도 안 가르쳐준’ 일들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대는 매우 훌륭한 눈치 양성 기관이다. 강도 높은 갈굼을 토대로, 군대는 어리버리한 한 인간을 ‘유도리 있는’ 예비역으로 길러낸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당연히 차별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그런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얻어 터지거나 쌍욕을 먹으면서 배워 왔던 그런 ‘유도리’가 ‘능력’으로 대접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어디에서 써있지 않은 그런 눈치와 유도리에 의한 것들, 그런걸 갖추지 못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일하기 어려운 상대, 부려먹기 까다로운 상대가 되고 강력한 반발을 받기 마련이다. 그럼 그런 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는 여성들 스스로도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들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거 하나 알아서 하지 못하냐고 갈굼을 당하기 때문에.
메뉴얼이 아닌 눈치와 유도리에 의존하는 사회 구조 덕분에 우리는 법에서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고, 훨씬 적은 임금을 받는다. 우리는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회식에 참석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윗사람의 커피를 가져다 드릴 의무를 갖고 있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무능력자, 사회생활 못하는 이가 된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매뉴얼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매뉴얼에 없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부적응자 취급을 받고 손가락질받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라면, 그건 좀 문제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