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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강박

요 몇 년 간 계속 ‘집필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글써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글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계속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생각이 너무 머릿속에 꽉 차서일까. 내가 그 생각들을 말로 풀어놓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글로 풀어놓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메모장을 열면 뭘 써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랜 딴짓 후에 겨우 몇 줄 적고 나서는 맘에 안들어 지워버리기를 수십 번, 결국 그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채 비싼 커피만 마시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전에 비해 글을 쓰는 분량 자체는 꽤 늘었다. 어쨌거나 인문학 계열의 학생으로 살아가다 보면 좋으나싫으나 글을 써야 할 일이 꽤 많고, 또 학보사니 뭐니 해서 글을 쓸 기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전에 <쓰고 싶은 글, 써야 하는 글>에서도 썼듯이 아무리 내가 쓰는 글이 많다고 해도 그게 써야 하는 글인 이상, 그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만다. 글 한번 시원하게 ‘싸지르고’나면 기분도 상쾌(?)하고 스트레스도 풀리는데, 써야 하는 글은 그 정도 상쾌함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정말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은 예외다). 그러다보니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임에도 계속 집필욕구가 생기는 거고, 그게 급기야는 강박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집필강박의 이유는 또 있다. 뭔가를 하다가, 혹은 하지 않다가 문득 갑자기 글감이 팍 하고 떠오르는 때가 있다. 그럴 땐 머릿속에 문장이 막 떠오르고 (내 딴에는)문학적 기교까지 갖춘 수려한 글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머릿속의 구상이 실제 글로 이어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꼭 그럴 때만 그런 기가 막히는 글이 떠오르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거의 예외없이 그 생각을 글로 옮기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있거나, 어딜 가기 위해서 샤워를 하고 있거나, 노트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 기가 막힌 글감은 꼭 그럴 때 나를 찾아온다. 어디 간단히 메모를 해 놨다가 나중에 그걸 쓰려면, 생각했던 것만큼 글이 술술 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그 기가 막힌 글은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실체화될 수 없는 글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기가 막힌 글감을 놓쳤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 또 글을 쓰기 위해 몸이 달게 된다.

이건 어쩌면 집필강박이 아니라 ‘SNS강박’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 인스타 사진 찍으려고 무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있지 않나. 그 사람들 역시 인스타 강박에 빠져 있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일종의 그런 글 컨텐츠 발행에 대한 강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스타 하는 사람들과 나를 1:1로 대비하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이건 되지도 않는 ‘작가적 자존심’의 결과인걸까. 아무튼 나는 그런 부류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그런 인스타 하는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컨텐츠 제작의 욕구를 ‘소비’로 풀어낼 수 있는 그들과는 달리(인스타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핫한 컨텐츠는 ‘소비’를 전제로 한다)나는 풀어낼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겠지.

뭐 아무튼 지금 이순간에도 집필강박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 글 또한 그 강박의 결과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예전에 챙겨놓은 글감을 살려보다가 포기했고, 결국은 이런 힙하지 않은 자기푸념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이렇듯 내 강박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지도, 해소의 수단이 되지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커피를 마셨으면 이런 거라도 써야겠다는 또다른 강박의 결과로써 의미가 있다. 근데 진짜 이게 의미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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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시놉시스

예전에 모 프로젝트를 하면서 썼던 시놉시스. 예전 메일을 뒤지다가 발견했다.
내용을 보면 아는 사람은 이게 무슨 프로젝트인지 알듯(최종 결과물은 이대로 나오진 않았지만, 대략적인 스토리는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생각보다 잘 안돼서, 또 마음대로 안 되어서 안타까웠지만 지금 보니 모든게 추억.

이거 말고 로맨스 라인도 있었는데 그건 작년 외장하드 사망 때 함께 사망한 듯 하다ㅜ


Storyline: Adventure

#1(intro). 뉴욕, 세탁소. PM 06:00
– 번화한 뉴욕의 한 거리. 하루를 마친 주인공은 수수해 보이는 OZ cleaning이라는 이름의 세탁소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파티에 입을 옷을 세탁하고 있다. 이어폰에서는 해질녘 고즈넉한 세탁소 분위기에 어울리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세탁이 끝나고, 옷을 꺼내는 주인공. 그런데 세탁기 깊숙히 들어간 옷이 나오지 않는다. 세탁조 안으로 몸을 쑥 집어넣는 주인공. 그런데 갑자기 중심을 잃으며 세탁기 안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세탁기가 주인공의 몸을 끌어당긴다! 저항해 보지만 이내 주인공의 몸을 집어삼키는 세탁기. 결국 주인공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2(랜덤 Set 1). 서울, 청계천 한복판. AM 07:00
– 어딘가로 떨어진 주인공. 정신을 차려 보니 얕은 개울가 한복판의 돌덩어리 위에 쓰러져 있다. 전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벽에는 뭔가 동양적이지만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 위치를 검색해보니… Seoul??  기가 막힌 주인공은 이 황당한 상황을 페이스북에 올리지만, 친구들은 믿지 못하고 비웃을 뿐이다. 일단 거기에서 나오라는 친구의 조언대로 청계천에서 빠져나온 주인공. 일단 어디로든 움직여 본다.

#3(랜덤 Set 2). 서울, 서울광장-덕수궁. PM 01:00
– 걷기 시작한 주인공. 빌딩 가득한 도심을 지나니 널찍한 광장과 왕궁으로 ‘추정’ 되는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와우’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니 친구들이 놀란다. ‘진짜 한국에 간 거였어?’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는 페이스북 친구가 사진을 보더니 ‘이곳은 덕수궁 이라는 한국의 고궁이다’ 라고 알려준다. 덕수궁에 들어가 도심 속의 고궁을 즐기고 있으니 친구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하나둘씩 서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폰. 결국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버리고 만다. 헉, 어쩌지… 그래, 일단은 이 새로운 세상을 좀 더 돌아다녀보자! 돌아다니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겠지.

#4(랜덤 Set 3). 서울, 남산. PM 06:00
–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해질녘. 주인공은 폰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인 ‘남산’ 에 와 있다. 이곳은 사랑하는 연인이 자물쇠로 서로의 약속을 확인한다는 그곳. 맨하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에 감탄하며 잠시 감상에 젖으려는 찰나, 바람에 실려 날아온 전단지 한 장이 눈에 띈다. 클럽파티? 그래, 난 원래 클럽파티에 가는 길이었지! 전단지에 씌여진 안내를 보고 클럽에 찾아가기로 한다.

#5(Ending-Video letter). 서울, 홍대 클럽. PM 09:00
– 오마이갓. 지하철에서 내리자 저녁 9시인데도 마치 막 일어난 것 같은 활기찬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하다. 낯선 동양의 거리임에도 영어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패셔너블한 사람들이 신나게 웃으며 돌아다닌다. 마침내 목적지를 찾은 주인공. 서울의 클럽은 뉴욕의 클럽만큼이나 신나고 즐겁다! 지금의 처지는 모두 잊고 음악에 취해 신나게 즐기는 주인공.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스테이지의 불이 꺼지자 그제서야 자신이 낯선 도시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클럽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의 도움을 얻어 스마트폰을 켜고, 이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나를 도와줄 누군가에게 Video Letter를 보낸다. “친구, 내 아파트에서 내 여권을 가지고 서울로 와 줘. 42번가에 있는 OZ cleanning 세번째 세탁기에 몸을 집어넣으면 어딘가로 떨어질 텐데 그곳이 바로 서울이야. 알겠지? 나한테 오는 도중에 신비로운 풍경에 빠져 엉뚱한 데로 새지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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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글이 안 써지는 날

 유난히 글이 안 써지는 날이 있다. 꼭 그런 날은 ‘써야 할 글’ 이 있는 날이다. 직업적 글쟁이들은 마감이 임박하면 없던 글빨이 쏟아져 나온다던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서 마감이 다가올수록 안그래도 모자란 글빨이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글 쓰는데 청소거리 그득한 방구석에서 쓰긴 뭐하고 해서, 나는 쓸 글이 있으면 가능한 한 밖으로 나오는 편이다. 그리고 길바닥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글을 쓸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커피집을 가서 노트북을 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꼭 마감이 임박하면,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거나 인터넷이 말썽을 부리거나 컴퓨터가 말썽을 부린다. 그런게 없으면, 창 밖에 유난히 샤랄라한 자매님들이 자주 보인다. 밖이 안 보이는 구석자리로 오면, 옆자리에서 포풍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혼을 쏙 빼놓는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으면,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영어가사가 그날따라 귀에 쏙쏙 박힌다. 영어시험때나 이렇게 좀 들리지.

안다. 이게 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창밖의 자매님들은 언제나 샤랄라했고
옆자리 사람들은 언제나 시끄러웠고
영어가사는 평소에도 그정도쯤은 들렸다는 걸.

그렇지만 이게 다 핑계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글이 안 써지는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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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 2011년 11월에 메모해놨던 글인데 이제 발견. 완결된 글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미있네.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때의 내가 ‘형이상’이 뭔지 알긴 했던걸까.

불행은 결핍으로부터 온다
이시대에는 형이하의 과잉이 발생해 상대적으로 형이상적인 것들이 결핍
아무도 사색하려 하지 않고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아야만 믿음
이전의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의 사람들은 싸이나 블로그, 페북 같은 좁은 세상만을 가지고 산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사색하고 생각을 발전시킬 여유가 없다. 
여유의 결핍이 우리가 불행한 진짜 이유
자선이 행복한 이유는 그것 자체가 내가
여유롭다는것을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

재물의 결핍 또한 우리가 불행한 이유
돈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모두가 돈이 목표다. 재물이란건 이 세상 모두에게 충만할 수 없다. 
무한대의 목표를 가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돈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것을 모르거나, 알고도 실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돈을 통한 행복을 차선책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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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아주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한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치는 경우는 많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 생활범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다. 나는 혜화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 안의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밖의 사람들이래봤자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다. 명동은 조금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명동 안의 수많은 외국인들은 ‘여행객’이라는 특정한 카테고리에 묶이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라 그들 각자의 개성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난생 처음으로 다녀온 중국 여행은 전혀 새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고 내가 그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온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모습으로라도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인’들을 보고 왔다는 점에서 이번 중국 여행(?)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런 만큼 각자의 사정도 다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집떠나와 개고생’이었을 거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냥 해외관광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동기들과 함께하는 ‘졸업여행’이었을 거다. 그런 각자의 사정들 중, 내 사정은 조금 특이한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을 보았고, 또 사람을 만났다.

 이번 6일간 내가 접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다. 길림성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 길림신학교의 신학생들, 그리고 먼발치에서 보았던 북한 사람들. 이 중 신학생들은 조금은 특별한 상황에서 만났고 그들 역시도 우리와의 만남이 ‘특별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생활’을 보고 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길림성의 중국인들과 압록강 너머의 북한 사람들. 그들은 말 그대로 ‘생활인’들이었다. 사실 이들의 생활에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소팔가자에서의 만남을 제외하면 나는 중국사람들을 계속 그냥 지나쳐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그들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으므로, ‘유람선을 타고 구경’한다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을 통해 나는 그들의 생활을 약간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북한 당국에 의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이었을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기에 그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날것’에 가까웠다.

 두서도 없이 주절대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을 만나고 왔다. 그러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그들을 내 기준에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중국 시골의 많은 것들은 참 열악했다. 곳곳에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고, 낡지 않은 거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은 포장이 덜 되어 질척거렸고, 아이들은 헌옷을 입고 머리를 박박 깎은 채 흙길을 뛰어다녔다. 사방에 옥수수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6~70년대를 연상시키는 삼륜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나다녔고,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암흑에 묻혀 버렸다.
 강건너에서 구경한 북한의 모습은 더 열악했다. 낡은 건물들, 추운 날씨에 강가에 나와 물고기를 잡고, 물가에 나와 빨래를 한다. 북한의 모습은 잠깐 본 것이라 묘사할만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열악하다’는 느낌을 갖기엔 충분한 모습들이었다. 중국이나 북한 사람들의  모습 모두,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번화가인 혜화동과 명동에서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불쌍하다’고 느껴질 만한 광경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과연 ‘불쌍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비포장 도로에서 삼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불쌍한 것일까?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불쌍한 것일까? 나는 어쩌면 지극히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성찰을 거치고 나니 더이상은 그들의 꾀죄죄한(사실 이 표현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모습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그들의 생활세계 안에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특별히 불쌍하지도,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을 내가 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그 시점에 나와 버스 안에 있던 이들은 온갖 전자기기를 손에 쥔 채 화려한(=비싼) 옷을 입고 앉아 있었지만 썩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랜 이동으로 다들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마트폰 하나 없이 해진 옷을 입은 그들도 의외로 썩 불행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내 기준에서 ‘결핍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 그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한 번 의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나자, 그들의 생활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소박한 삶이 어쩌면 우리의 으리으리한 삶보다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비싼 물건들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면서도 불안해하고 부족해하면서 살지 않나. 하지만 그들은 자기 몸만 가지고도 썩 나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상투적인 말로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란 말들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항상 그러던 대로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다른 이들의 생활을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행복의 여러 가지 모습(물론 그들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을 발견하게 해 준, 또 ‘생활인’으로써의 사람들을 경험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덧붙이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자 유람선에서 북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왔다는 게 굉장히 껄끄러워졌다. 물론 그런 방법이 아니면 그들을 볼 수조차 없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방법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동물원의 동물들 구경하듯이 구경하고 왔다는 게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관광객’과 ‘피관광체’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하게 들었다. 우리는 언제쯤 그들을 인간으로 만날 수 있을까.

딴짓을 하면서 글을 쓰니 글이 중구난방이 되었다.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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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기상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할 일이지만, 난 벌써 43개월째 꼬박꼬박 오전 6시에 기상하고 있다. 물론 가끔 ‘긴밤’의 은혜(?)를 입고 30분이나 혹은 몇 시간 정도 푹 잔 적이 있긴 한데, 그래도 1년 중 거의 90% 이상은 6시에 꼬박꼬박 일어나는 생활을 3년 반째 해오고 있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지난 30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센세이션한 일이다. 서른둘 이전까지의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내가 올빼미형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였다) 저학년 때에도 늦게 잔 기억이 있는걸 보니 태생이 올빼미였나 보다. 그땐 아버지 직장이 늦게 끝나던 때라 다른 집보다 저녁시간이 한참 늦었다. 우리집은 항상 9시 뉴스데스크를 보면서 저녁을 먹었는데, 다른 집은 6-7시에 저녁을 먹는다는 걸 알게 되고 난 후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저녁을 늦게 먹다보니 자연히 자는 시간도 늦어졌고, 뭐 그러다보니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졌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분명히! 늦게 잤다. 그땐 야자가 있던 때였고 3년 내내 대부분 오후 9시~10시 정도에 끝났다. 집에 오면 10시가 넘었는데, 나는 절대 집에 오자마자 자는 법이 없었다. 드라마와 11시 토크쇼(그땐 참 토크쇼를 많이 했다)를 다 보고 부모님이 자러 들어가시면 플스를 켰다. 중3-고1 넘어가던 시기에 1년간(!) 모은 돈으로 플스를 장만했었는데, 막상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그걸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열두시 넘어서 플스를 켰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다. 그때 하던 게임들이 전부 일본식 RPG같은거라 플레이 시간이 수십~수백시간에 달했는데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그런 게임 엔딩을 수십 개를 봤다. 도대체 게임을 얼마나 한거야… 아무튼 그때 나는 그 게임들을 하려고 밤 열두시부터 새벽 두세시까지 거의 매일 깨어 있었다. 가끔 부모님한테 걸리기도 했지만 뭐 그렇다고 안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러다보면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등교가 7시 30분까지였는데, 6시 반에 엄마한테 온갖 욕을 다 먹으면서 겨우 일어나 학교에 갔다. 그땐 진짜 만원버스에서 버스 손잡이에 기대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아침엔 정말 비몽사몽이었다. 세시에 자서 여섯시 반에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지금 생각해도 대학교 간 게 용하다), 마침내 부모님의 품을 떠나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뭐… 거의 낮밤이 바뀐 생활들이 이어졌다. 새벽 네시 전에 자는 법이 없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잠을 일찍 잘 수가 없었다. 밤 열두시가 기숙사에서는 대낮에 가까웠으니까. 술을 마시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아예 외박계를 써 놓고 밤새 술을 마시기가 일쑤였고, 얌전히 방에 있더라도 열두시면 한참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거기다가 누가 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게임을 하다 보면 밤을 꼴딱 새기 일쑤였다. 새벽 네 시는 기본이었고, 여섯 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그렇게 살다보면 일어나는 시간이 빠를 수가 없었다. 기숙사에선 여덟 시에 아침밥을 줬는데,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그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부지런한 친구가 깨워주거나 갑자기 방장 형이 방 사람들을 다 깨워서 밥을 먹으러 가거나 해서 일어난 적은 있었지만, 절대 8시에 자력으로 일어날 수는 없었다. 8시에 못 일어나면, 쭉 자는 거였다. 1교시가 9시 30분 시작이긴 했는데, 나는 4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1교시 수업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한 번도 없는줄 알고 찾아봤더니 있긴 있더라). 거기다가 주4일 수업인 경우도 많아서,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날이 많았다. 뭐 그런 날은 쭉 자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는 뭐 짤없이 6시(동절기엔 7시) 기상… 일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난 해안경계 부대에서 2년여간 복무를 했는데 거긴 밤에 근무를 서고 아침에 자는 그런 부대였다. 늦게 자는 걸 넘어서 아예 밤을 새는 부대였던 거다. 근무표에 따라 생활패턴이 바뀌기는 했지만, 한참 심할 때엔 3~4개월간 ‘오후’ 6시 30분에 출근해 해질때 퇴근하는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다. 즉, 결국 난 군대 가서도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제대 후 복학했더니, 1학년 때의 그 올빼미 생활이 이어졌다. 거기다가 고학년이 되면서 팀별 과제가 많아졌는데,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새벽까지 깨어 있게 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야근이었던 거지. 그렇게 야근(?)을 하며, 혹은 게임을 하며 내 대학교 생활의 대부분은 늦게 자고 늦게 자는 생활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직장생활? 뭐 야근이 8할이었다. 회사에서 야근수당 1위를 찍은 적도 있으니(야근으로 한달 만근을 채웠다) 말 다했다. 과제지옥이었던 3~4학년을 지나면서 야근엔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직장에서의 야근은 그야말로 하드코어했다. 과제야 뭐 며칠만 바짝 하면 되었지만 직장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이었기에, 야근은 그냥 일상이 되었다. 매번 집에 열두시 넘어서 들어가니, 당연히 아침 기상시간은 빠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회사가 다 별로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8시에 겨우 일어나 준비하고 출근을 하는 생활들이었다(그나마도 가끔 늦었다). 날을 새서 잠을 안 자고 6시에 깨어 있었던 적은 있지만, 6시에 ‘기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학교를 왔고 평생 처음으로 6시 기상이 ‘일상’이 되었다. 난 아직도 내가 6시에 눈이 번쩍 뜨인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Benedicamus Domino(모 영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거룩한 장면이 절대! 아니다)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8시에도 겨우 일어나 출근하던 내가, 벌써 43개월째 6시 기상 중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최소한 3년 반은 더 이렇게 살아야 한다(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걸 생각하면 진짜 놀랄 노자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한 번도 사고 안 치고 꼬박꼬박 6시 기상을 해 오고 있다는 거. 이거야말로 진짜 Deo gratias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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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딜레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아, 이거 시험만 아니면 참 재미있게 볼 수 있을텐데’란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시험을 안 보면 공부를 안 할 거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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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요즘은 ‘퇴근’ 할 일이 없다보니 퇴근길을 경험한 지도 오래 되었다. 뭐 학기중에야 학교 안에만 있으니 퇴근의 개념이 없고(그나마 학교 안에서는 어디 있든 10분 이내에 귀가할 수 있다), 방학 중에도 대부분의 일정이 명동 안에서 소화되니 저녁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돌아올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요근래 이런저런 일들과 약속들 때문에 멀리 나갔다가(그래봤자 서울 안이지만) 저녁쯤 귀가하는 일이 몇 번 생겼다. 8월 중순까지 워낙에 바빴던 터라 약속이 몰렸는데, 덕분에 연일 약속이 잡히는 통에 마치 예전에 회사 다니던 것처럼 ‘퇴근’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거 며칠 했다고 퇴근 운운 하는건 좀 오바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 퇴근 비슷한 것들을 하다 보니 예전 생각도 나고 그러더라.

 (알바를 포함해) 일이란 걸 처음 해 본 게 대학교 1학년 마치고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퇴근에 대한 첫 기억은 대학교 1학년 때였을게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 전 일이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뿐더러, 동네에서 일을 한 거라 퇴근길이라는 느낌도 별로 안 들었다. 그 후에도 주유소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주유소는 역시 동네였고 편의점은 남들 다 출근할 때 퇴근하던 기억 때문에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퇴근길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퇴근길’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첫 기억은 2006년 코엑스에서 알바하던 때인 것 같다. 그땐 오전조를 하면 오후 6시에 퇴근, 오후조를 하면 오후 10시 좀 넘어서 퇴근을 했으니 직장인 퇴근 시간과 비슷했다,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 역시 직장인들이 많은 삼성동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직장인스러운’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퇴근을 하면서, 나는 그때부터 직장인의 퇴근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뭐 퇴근길이 별 거 있겠냐만, 하루의 일을 마치고 나서 고단한 몸으로 집에 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이동과는 구분되는 퇴근길만의 감정상태가 형성되는 것 같다. 거기다가 해가 뉘엿뉘엿 져 가거나 아예 밤이 된 상황, 혹은 아예 하루가 끝나버린 늦은 밤시간에 버스에 타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퇴근길은 참으로 감성적이다. 어떨 때엔 이미 술한잔을 걸친 말랑말랑한 감정 상태이기도 하고, 어떨 때엔 또 녹초가 되어 이어폰에서 무슨 노래가 나오는지도 모르는(심지어는 노래도 안 틀고 이어폰만 꽂고 집에 온 적도 있다)멍한 상태일 때도 있다. 뭐 이런저런 차이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퇴근길은 감정이 많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퇴근이란 게 막 펄쩍펄쩍 뛰고 그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경우에는 유난히 푹 가라앉아서 퇴근을 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보면 퇴근길에 야구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신명나게(?) 집에 가는 것 같던데, 나는 그런 건 거의 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 들으면서 집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 말고는 뭐 트위터 정도? 트위터도 버스를 탈 땐 잘 안하고(멀미가 났다), 지하철로 집에 가는 경우에나 가끔 하곤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약간은 멍한 상태로 버스 좌석에 널부러진 모습. 그게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 같다. 뭐 엄청 신나거나 그런 거 없이 음악 좀 들으면서 집에 가니, 자연스럽게 감성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거기다가 내가 퇴근길에 감성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 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이건 아까 이야기했던 아주 예전의 퇴근길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나 기억이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땐 집에 가면 누가 있었거든. 근데 코엑스에서 알바하던 때부턴,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자취를 했었으니. 당시에는 아무 느낌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돌이켜 보니 집에 가면서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혹은 회식자리에서 왁자지껄 하다가도 집에 가면 아무도 없다는 것. 그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썩 좋은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집이 적막한 게 싫어서 집에 들어가면 티비부터 켰었으니, 그런 ‘아무도 없는 집’에서의 영향이 알게모르게 꽤 있었나 보다.

 아무튼 그래서 퇴근길은 참 감성적이었다. 글감도 막 떠올랐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막 떠올랐다. 뭐 물론 집에 가면 글감이고 뭐고 널부러져서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다가 잠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래서 그 감성과 사색의 시간이 결코 생산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다른 시간에는 느끼기 힘들었던 독특한 느낌을 가진 시간이었다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어쩌면 평생 그런 퇴근길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게 된 처지에서, 그때 느꼈던 퇴근길 특유의 느낌은 참 아련하게 다가온다. 난 또 이런 감정을 언제 느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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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기 전에 한 인간

본당에서 드리는 새벽 미사에는 장애인들이 몇 분 오신다.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인데, 두 분은 목발을 짚고 오시는 분이고 한 분은 아예 휠체어에 앉아 계신 분이다(이분은 뇌성마비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엔 성당 뒷쪽에 앉아 계셔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영성체할 때는 제대 앞으로 나와야 하니 그때 자주 마주치게 된다.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라 앞으로 나오는 속도나 영성체하는 속도가 다른 사람들보다 느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목발을 사용하시는 두 분은 나름대로의 스킬(?)이 있어서 남들과 비슷한 속도로 영성체를 하고 들어가신다. 다만 휠체어에 앉아계신 분은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 앞까지 와서 영성체를 할 수가 없어서(영성체하는 위치 바로 앞에 턱이 하나 있다) 맨 마지막에 나와서 영성체를 하고 나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거나 영성체 행렬이 지체되지는 않는다.

 그분들을 보고 있는 건 참 흥미롭다. 구경거리처럼 느낀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을 깨 주기 때문이다. 으레 우리는 장애인들을 만나면, 뭔가 배려가 필요한 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어느 정도의 배려나 양보가 필요할 때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성체를 하시는 그 분들을 보면, 그들 또한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목발을 짚고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 불편한 점이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사용하며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놓고 앉아 남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장애인들을 하나같이 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오히려 선의를 가진 이들에게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아예 관심이 없으니까). 물론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분들이 있다. 그렇지만 미사에 오시는 그분들처럼 알아서 잘 살아가는 분들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이들까지도 도매금으로 묶어 취급하는 건 평범한 이들과 같이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그분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란 생각이 든다.

 모든 장애인들을 동정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로 생각하는 건 어쩌면 외형적으로 멀쩡(?)한 나에 비해 그들을 아래로 보는 시각의 반영이 아닐까. 충족된 이(나)와 부족한 이들(장애인)의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 전체를 ‘장애인’이라는 지나치게 큰 카테고리로 범주화시켜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그들을 각자의 개성을 지닌 개별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장애인이라는 몰개성적인 이미지로 퉁쳐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막 들기 시작한다. 장애도 그 사람의 한 개성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나도 겉모습만 멀쩡하다 뿐이지 수많은 하자(?)를 갖고 있는 인간인데, 그들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결점들 중 특별히 외형적인 결점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그들을 ‘장애인’이라는 무식하게 큰 카테고리로 퉁쳐서 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태도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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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위기

 일반적으로 살아온 내 나이 또래, 혹은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의 입장에서 ‘굶어 죽을 판’이란 말을 피부로 느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다들 태어나면서부터 대학교 졸업 때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쭉 부모 세대의 지원과 보호 안에서 살아가게 되며 덕분에 술값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신 적은 있어도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생존위협을 느낀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어디까지나 대학 졸업해서 직장 취직하는 ‘일반적인’케이스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생에 딱 한 차례 생계비 문제로 ‘생존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

 2007년,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을 한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래 거창한 ‘미국 어학연수’ 계획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어버린 후, 졸업 후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 전공 특성상 서울 정착자금을 번다는 명목으로 장기간 모 문구유통점의 ‘용역사원’으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알바’를 하던 1년간의 생활은 썩 사정이 좋지 못했다. 어차피 알바 월급이란 것이 거기서 거기인지라(그래도 낮에 일하는 알바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소득 자체가 넉넉지 못했고, 또한 알바의 목적 자체가 당장의 생존보다는 졸업 후 서울 정착을 위한 돈벌이의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만큼 돈을 모아 놔야 했다. 내 경우 집에서의 지원은 전무했고(지원이 있었으면 애당초 알바를 하는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터라 당장 거처부터가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초반엔 친구 집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하던 곳이 코엑스였기 때문에,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 하에 인근의 고시원을 알아보았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기본적으로 다른 동네보다 월세가 5~10만원가량 비쌌는데, 어차피 다른 동네에서 출퇴근하면서 교통비 쓰는 것을 감안하면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는 계산 하에 대치동(!)의 30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거지 마련에 30만원이라는 거금을 매달 들이붓게 된 상황에서, 생활은 당연히 극도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비싼 강남에서 일하다 보니 식비가 큰 부담이었는데, 한 끼에 5천~7천원씩 30일이면 벌써 식비만 50만원이었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쳐도 30만원인데, 거기다가 가끔 술 한잔씩 하고 필요한 물건(혼자 살면 생각보다 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많다) 사고 하면 돈 모으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는 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단 식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처음엔 도시락을 싸 오는 다른 동료에게 빌붙으면서 식사를 해결했는데, 고시원에서 ‘밥’은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 밥을 싸 온 다음 구색용으로 통조림이나 김을 챙겨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다른 분들이 양해를 해 주었기에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굉장히 염치없는 짓이긴 했다. 그렇게 좀 살다가, 이마저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렵게 되자 편의점 음식으로 한끼를 때우면서 생활을 해야 했다. 라면에 삼각김밥이면 밥집에서 사먹는 식비의 절반 정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먹고 힘쓰면서 일했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고생하면서 알바를 1여 년간 한 덕분에 나는 반지하이긴 하지만 내 세간살림이 들어찬 월셋방을 가질 수도 있었고, 약 600만원을 모은 상태로 마지막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1년 일해서 600만원 모은 게 별로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알바로 모은 돈이었다는 점과 위에서 언급한 모든 생활비를 매달 지출해가면서 모은 것을 감안해볼 때 내 입장에서는 ‘영혼까지 다 끌어 모았다’ 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 생활비 명목으로 추가대출을 받은 100만원까지. 이만하면 졸업준비는 다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아, 중간에 두어 차례 친구가 다니던 영상 프로덕션의 조연출을 하며 3~4일 정도 일당을 받긴 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기적인 수입을 1원도 올리지 못했다.

 이 무소득의 타격은 생각보다 컸다. 일단 내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월세는 꼬박꼬박 계속 나갔다. 몇 달 월세를 내지 않기도 했지만 바로 윗층에 집주인이 살고 있는 처지에 몇 달이고 버티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식비도 계속 나갔다. 집이 생겨 취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는 해도 변변찮은 반찬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상황에 매일 맨밥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도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한참 쪼들리던 때 밑반찬에만 먹는 밥이 지겨워서 일주일에 한번 중국집에서 ‘탕볶밥’을 시켜먹던 기억이 나는데, 무슨 요일 이벤트라고 해서 볶음밥 가격에 탕볶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복학 후 2년 반 동안의 학자금 대출의 상환기한이 돌아오고 있었다. 원래는 4학년 2학기를 마치면서 취업을 하게 되면 갚기로 되어 있던 것들이었는데, 1년을 휴학하다 보니 취업 후가 아니라 학기 중에 상환기한이 닥쳐 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그나마)감당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곧 6개월 단위로 상환금액이 두 배씩 불어났다.

 이런 불가피한 문제 이외에도, 무소득이라는 환경에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을 그만두니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할 때엔 의외로 돈을 잘 쓰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데다 근무중의 음료 같은 것도 내가 사는 것보다 내 위의 정직원들이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오후 조를 하면 밤 10시에 끝나는 스케줄 덕분에 술 마실 시간이 되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어서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고시원에 사니 어지간한 살림은 늘릴래야 늘릴 수도 없었으니 컴퓨터나 전자제품 따위에 돈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을 딱 관두고 학교에 다니니 돈을 쓸 일도, 돈을 쓸 시간도 풍부해져 버렸다. 1주일에 이틀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이제는 세종시가 된)충남 조치원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교통비가 들었다. 거기다가 이틀이기 때문에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필수적으로) 술값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또 4학년이니 음료나 군것질거리를 사줄 사람은커녕 내가 사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약 3~4개월 학교를 다니면서 엄청나게 돈을 썼다.

 학기가 끝났다고 해서 돈 쓸 곳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말 그대로 ‘백수’였기 때문에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다. 내 집이라고는 하지만 환경이 썩 좋지 않은 방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처박혀 있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계속 어딘가는 쏘다녀야 했고, 계속 지출이 발생했다. 그리고 백수 초기만 해도 잔고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쓰고 다녔다. 그 결과 나는 ‘채워지지 않는 잔고’ 에 대한 두려움을 그 때 알게 되었다. 사실 뭐 그전에 용돈 받아서 살던 시절에는 잔고가 바닥나도 걱정이 없었다. 거처와 식사는 선불 완납된 기숙사에서 해결 가능했고, 전화 한 통으로 돈이 ‘충전’ 되던 시절이었으니.

 백수로 살던 시절의 지출은 돈을 한참 벌어봤던 지금 입장에서 보면 참 소박하긴 했다. 역시 밑반찬 위주의 식단에 질려 가끔 시켜먹던 중국집, 가끔 술, 그리고 가끔 예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가게 되면서 쓰는 교통비와 간단한 지출, 무슨 공짜 강좌 따위에 참석하거나 취업 때문에 면접 같은 곳에 나타나는 교통비나 식비, 온라인 게임 1개월 정액요금 등… 지금 생각하면 어디다가 돈을 썼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돈은 깨알같이 빠져나갔다. 한참 돈이 쪼들리던 시절에는 뜬금없이 등산을 하러 동네 뒷산(그래도 해발 600m나 하더라)에 올라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7만원짜리 자전거를 사서 한강 자전거도로를 쓸고 다니는 짓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 7만원짜리 자전거를 거의 3달 가량 매일 끌고 나가 돌아다니면서 시간 죽이기와 이동을 해결하고 다녔으니 훌륭하게 제 값을 해낸 기특한 자전거였다. 물론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말 그대로 쇳덩어리 자전거라서 오로지 평지만을 달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보니 굉장히 유쾌하게 그 시기를 회상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유쾌한 시기는 아니었다. 내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엔 필름 살 돈이 없어서 한컷 찍는 데 온갖 고민을 했던 때이니 말이다(36컷 필름이 한 통에 싸게 사서 1~2천원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잔고의 압박이 다가오는데 일을 할 수 없는 괴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대한민국의 취업시장에 대해 대학 시절부터 근거 없는 지나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이 닥쳐오니 대한민국에서 대졸자로 취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몸소 깨달아야만 했다. 전공이 광고기획인지라 기업 마케팅 부서나 광고대행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처음엔 겁도 없이 기업 마케팅 부서를 두드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야말로 솔직한 서류에, 솔직한 학점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자기소개서(그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로는 서류심사 문턱조차 넘기 힘들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행사 쪽은 죽어도 가기 싫었다. 결국은 애꿎은 내 청춘의 시간들만 잔고와 함께 계속 소모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르바이트도 그 시점에서는 하기가 힘들었다. 취업준비생이란 신분의 특성 때문이었다. 방학중이나 휴학중에는 내가 굳이 일을 만들지 않으면 스케줄이 없으니 하루의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점유하는 알바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취업준비기간에는 그게 힘들다. 어쩌다가 서류 붙어서 면접이라도 오라고 할 때에 알바를 하고 있으면 면접 참석에 지장이 생긴다. 알바 입장에서 입사면접이 있으니 오늘 하루 빼 달라는 소리는 나를 빨리 잘라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지라(물론 오래 일한 입장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섣불리 알바를 구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또 취업준비생이라는 입장은 고용주 입장에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취업준비생이란 건 말 그대로 취업이 되면 언제든지 사라져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거의 모든 알바구인 글에 ‘장기근무 가능자 우대’ 란 말이 씌어져 있는 상황에서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취업준비생이 그럴 듯한 알바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맞게 된 2008년 5월.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에 치달아 있었다. 잔고는 오늘내일을 바라보고 있었고, 위기감에 구해본 몇 군데의 알바자리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말았다(키 작은 게 그때처럼 한스러운 적이 없었다). 버스비조차 부담되는 상황이 되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 이외의 외출은 불가능해졌고, 당연히 온라인게임 정액요금도 낼 수가 없었다. 취직한 친구들 덕분에 하루짜리 알바 같은 걸 몇 개 할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 결국 나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김영삼 정부의 심정으로 집에 구원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IMF와는 달리 우리 집엔 나를 구제해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없었다. 집에서 돈이 왔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왔더라도 (부모님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큰 도움은 안 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잔고위기의 상황…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반지하 방에 앉아서 맞이하는 이 절박한 상황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매일 인터넷 뱅킹을 열어 잔고로 버틸 수 있는 기한을 계산하고,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의 잔량을 확인했다. 내다 팔 물건이 없나도 확인해 보았지만, 내다 팔 만큼, 그리고 내다 팔아서 만족할 만큼 돈을 받을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 시간이 지난 후 근처 친구 집에 가 밥과 술을 얻어먹고, 자전거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 즈음 위기감이 고조된 나는 결국 기업 마케팅팀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대행사 쪽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행사 업계라지만 아무 관련경력도, 공모전 수상경력도 없는 신입인력을 덥석 낚아갈 회사는 흔치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닥을 보이는 잔고에 위기감을 느끼고, 답장 없는 지원메일에 좌절하면서 5월을 보내고 있었다.

 6개월을 기다린 반가운 소식은 얄밉게도 한꺼번에 찾아왔다. 먼저 훌륭한 알바 자리. 친구네 회사에서 재택으로 업무를 해 줄 인력을 구하는데, 그곳에 연락이 닿았다. 대학교 동기이니 면접 따위는 가볍게 넘어갔고, 사무실에서 업무 브리핑을 받은 후 다음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알바자리였지만 수개월 동안 거듭되는 탈락과 거절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성공’이었다. 이 작은 성공 덕분에 얻은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머금고 알바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로비를 나서는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뭐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 전화는 몇 군데 이력서를 넣은 대행사 중 한 군데에서 온 전화였고 그렇게도 내가 기다리던,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 전화였다.

 그 전화를 끊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통화내용은 당시에 너무 어안이 벙벙했던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오피스 빌딩에서, 구직에 성공하고 회전문을 나서자 마자,  정규직 합격 통보를 받은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이란… 정말 그렇게나 날씨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5월의 하늘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빌딩 앞의 광장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펄쩍펄쩍 뛸 뻔 했다.

 합격 통보의 흥분이 가라앉자, 사소한 문제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인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던 알바자리 역시 다음주부터 시작이었던 것. 물론 취직한 마당에 그런게 대수겠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의 큰 ‘성공’ 때문에 작은 성공을 안겨준 사람에게 죄송한 소리를 해야 했고 더군다나 그 대상은 안면이 있는 대학교 동기였다.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이런 좋은 소식이 겹친 것이 아주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인생에 잠깐이지만 심각하게 닥쳐왔던 생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제 비로소 스스로 벌어서 스스로 먹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겹친 또 하나의 작은 행운이라면, 월급날이 애매하게 걸려서 입사한지 불과 보름여만에 (완전한 1개월 액수는 아니지만)첫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오늘내일 하던 차에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나에게는 굉장히 큰 기쁨으로 다가왔었다.

 지금이야 굶어죽을 걱정 없고, 내가 노력하면 잔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속 편한 처지가 되어 살고 있다. 거기다가 전혀 월세걱정 없는 주거공간도 갖추고 있으니 그때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옛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 나는 참 절박했었지란 생각과 함께 그 (남들이 보기엔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를)위기를 어찌어찌 이겨내며 살았던 그 시절의 나에 대한 대견함을 느낀다. 이젠 평생 그럴 일이 없겠지만, 때때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작은 좌절에 밀어넣을 때면 항상 그 좌절의 시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