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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Me

맥북 이야기

 지금(2019년 2월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컴퓨터는(태블릿 ‘PC’를 제외한다면) 나온지 7년이 다 되어 가는 2012년 6월 출시 13인치 맥북프로(2012Mid)다. 아마 이게 비레티나 맥북 프로로는 마지막 제품일 거다. 지금 세대 맥북에서는 다 사라진 것들이 많이 달려 있다. DVD-rw(지금은 들어내고 그 자리에 HDD를 달아놓았다), 미니디스플레이 포트(요즘건 없더라고), ir리시버(이제는 애플샵 직원도 그 존재를 모르는 ‘리모콘’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물건) 같은 것들이 여기 다 달려 있다.

 이걸 살 때에는 물론 최신 노트북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였는데, 2012 맥북 라인업이 업데이트되자마자 샀으니 이 제품의 온라인 구매자로는 순위권 안에 들 수도 있다. 그때도 레티나 맥북 프로가 있었지만 더럽게 비쌌고 나에겐 그 정도의 성능이 필요치 않아서 그냥 맥북프로 라인의 저렴이(?)를 골랐었다. 이미 데스크탑은 게임용을 하나 쓰고 있었고, 예전 회사에서 맥북(화이트, 2007년 모델)을 썼었는데 퇴사 때 반납한 후 노트북의 필요성이 생겨서 산 거였으니 굳이 고성능이 필요 없었던 거지.

 아무튼, 사고 나서 잘 쓰다가(사실 이걸로 일은 얼마 안 했다) 신학교를 오게 되었다. 살고 있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성당으로 들어가는데 데탑은 집에 보내고 이 맥북만 들고 왔다. 그때 생각으로는 짐도 줄이고 게임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 왜 신학교 오면 게임을 안 할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쨌거나 그때부터 나는 다른 윈도우 컴퓨터 없이 이 맥북만 쓰게 되었다. 윈도우가 없는 환경에서 살면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고 또 학기중엔 학교 컴퓨터실을 쓰면 되니까 아주 치명적인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7년을 맥북 하나로 버텨 왔다. 다만 이제 연식이 꽤 된 컴퓨터이다보니 기본적인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이거 쓰는데도 자판이 밀리니 뭐 말 다 했지.(메모 앱이 많이 무거워진듯)

 이걸 처음 장만할 때에 비하면 맥북 사용자가 정말 많이 늘었다. 그때 맥은 진짜 쓰는 사람만 쓰는 물건 정도였고 그나마 부트캠프로 윈도우 깔아서 쓰는 사람도 꽤나 많아서 osx깔아서 쓰고 있는 사람 보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별다방에는 유난히 맥북이 많았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네이티브로 맥을 쓰는 사람도 많고 어딜 가나 사과가 번쩍이는 노트북 뒷판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요즘 맥은 사과에 불이 안들어오긴 하지만). 뭐 남이 뭘 쓰던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도 (전직)덕후의 마음이란 게 희소성있던 물건이 대중화되면 괜히 샘나고 그런 게 있어서 아쉬운 마음도 조금 들고 한다(왜?).

 점점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 가고 있다. 아무튼 오래 쓰다 보니 애착도 생기고 오래 되었음에도 아직까진 쓸만 해서 7년차 노트북임에도 현역으로 잘 써먹고 있다. 그러고보면 아무리 요새 osx가 문제가 많다고 해도 좋은 운영체제이긴 한 것 같다. 예전 윈도우 쓰던 때라면 7년전 모델을 쓰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물론 이걸로 최신게임을 돌리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사양에 크게 예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상편집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니 잘 만든 os인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당장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들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뭐 바꾸면 좋겠지만 워낙에 비싼 물건이기도 하고 지금 쓰는 데에 크나큰 지장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노인학대를 하고 있나 보다.

 나이가 들다 보니 점점 빈티지한 것들,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스마트폰처럼 좀 안 바꾸면 많이 느려져서 꽤 불편한 것들이 아니면 딱히 새로운 것을 장만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짐이 점점 는다. 어쨌거나 살아가면서 이것저것을 계속 사게 되는데, 예전 것들을 버리지는 않으니까. 이럴 바엔 그냥 아무것도 안 사는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지만 이게 또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안 사면서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들다. 또 워낙 자잘한 소품들을 좋아해 놔서… 그러다보니 옷장엔 입지도 않는 옷이 한가득이고(SPA브랜드 옷들도 다 튼튼해서 십년씩 입어도 멀쩡하다. 낡은 건 또 빈티지라는 명목으로 남겨 놓고) 서랍에도 온갖 쓰잘데기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다. 이런 와중에 7년이나 된 물건이 아직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좀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다. 특히나 노트북 같은 성능에 민감한 기기가 이렇게나 버텨 주니 말이다.

 사실 맥북으로 업무를 보는 건 예전부터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윈도우 쓸 땐 모니터가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수백 수천 행의 엑셀 데이터들을 편집하곤 했었는데, 이상하게 맥북으로만 하면 자연스레 느긋한 한량모드가 되어 업무를 해야 할 상황인데도 웹서핑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하기 일쑤였다. 10여년 맥북을 쓰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원인은 맥의 마우스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맥 마우스 커서에 가속도가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맥 운영체제인 osx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면 커서가 띡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스르륵 하고 움직인다. 말로 하려니 어렵네. 아무튼 그래놔서 코딱지만한 PPT 오브젝트를 미세하게 조정하거나 하는 데엔 썩 적합치 않다. 스크롤도 관성이 적용되어 있고… 그래서 빠릿빠릿하게 일을 안 하게 되나… 가 아니라 그냥 일을 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일보단 노는 것에 최적화된 내 맥북이지만 그래도 이걸로 레포트도 많이 쓰고 논문도 하나 쓰고 했으니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이걸로 논문 하나만 더 쓰면 된다. 그때까진 현역으로 잘 버텨주길.(그때되면 바꿀 여유가 되겠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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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est

언행 불일치

지난 2월 1일부로 ‘말씀의 봉사자’가 되었다. 제단 위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강론’의 권한이 생김으로 인해서.
덕분에 그래서 주기적으로 남들에게 ‘고상한’ 말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내가 다른 이들, 특히 많은 이들 앞에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나 역시 그런 기회를 주도적으로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하기 싫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젠 반드시 주기적으로 교훈적인(물론 반드시 교훈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부족한 인간인 내가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참 영광이고 감격스럽고 그렇다. 이게 싫다는 생각은 (아직까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문제는, 내가 그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주제넘게 떠들어댄 그 이야기를 나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더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은 주일학교 강론이 있었다. 그날 복음이 참행복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피안의 행복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좀 벅찬 것 같아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와 우는 이들에게 보여 주시는 관심을 주제로 강론을 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론이 끝나고 미사도 끝나 성당 밖으로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다가왔다. 신부님이냐고 물어보길래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은 부제라는 걸 잘 모르는듯 했지만 수단을 입고 있으니 성직자인가보다 했나보다. 아무튼, 그 사람은 어렵게 나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며 만원만 달라고 청했다. 천원도 아니고 만원. 하지만 그때 나한테는 지갑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동행하던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따라 들어가 할 일이 있던 나는 좀 난감해졌다. 난색을 표했더니 급했던지 사무실에라도 가서 좀 빌려줄 수 없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성당 직원분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사적으로 돈을 빌릴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며 곤란함을 드러내니 그 사람은 뭐라도 해 줬으면 하는 표정으로 계속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먼저 간 사람들을 얼른 쫒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나는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를 떠나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갑을 가지고 나와 도와드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방이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 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 분 전에 했던 강론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내가 내 입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는데.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자고 내가 이야기했는데. 불과 몇 분 전에.
괴로웠다. 강론대에 올라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 놓고 정작 나는 가난한 사람을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렸다. 뭐 물론 사기꾼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만 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만원을 가진 사람이었고. 내가 내 입으로 떠든 대로라면,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아, 나는 강론대에 올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같은 내용으로 하게 될 두 번째 강론을 하기가 두려웠다. 이미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어린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거 좀 늦게 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텐데. 들어가서 지갑 좀 가지고 나오는게 그렇게나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나. 내가 예수님을 모른 척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한 내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론을 새로 쓸 시간은 없었고, 나는 결국 (거짓말이 되어버린) 준비한 강론을 다시 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그렇게 살기가 참 어렵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사족으로 붙인 채.

좋은 말을 하기는 참 쉽다. 오랜 기간의 학습과 배움으로 우리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답에 가까운 그럴듯한 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말이 참말이 되도록 살기는 쉽지 않다. 나도 안 하는 걸 남보고만 하라는 건 위선일 뿐이다. 강론이란 걸 하게 된 지 불과 3주만에, 나는 내 위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좋은 말’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된 것 뿐이지. 그래서 계속 좋은 말은 할 거다. 어차피 이제 그게 내 직분이 되었으니까. 대신, 그 ‘좋은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할 거다. 나에게 그런 좋은 말을 많은 이들 앞에서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분을, 또 그런 말을 고맙게도 잘 들어 주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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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Me

창작욕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화가’다. 그림 그리는. 뭐 먹고살기 바빠 어떨 땐 취미로 그림 하는 사람들보다 더 그림을 멀리 하고 사시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본업은 ‘화가’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아직 가능태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꽤 전도유망한 미술학도셨다고 한다. 풍경을 자주 그리시다 보니 내 취향과는 다소 맞지 않지만(나는 조금 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 작품을 보면 나 같은 똥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며 화가가 맞긴 맞구나(아버지 죄송합니다ㅠㅠ)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덕에, 나도 예술적인 센스는 조금 있는 것 같다. 사실 이걸 뭐 내 입으로 이러쿵저러쿵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남들보다는 좀 더 예술적 기질이 있긴 한 것 같긴 하다. 아버지가 내가 어랬을 때 그림그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기 때문에(소질이 없다고 일갈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난하게 살거 같아 그러셨던 것 같다) 스킬이 없어서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재주는 없지만, 어쨌거나 머릿속에는 창조적인 생각이 들어있고 여건이 된다면 그게 결과물로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던 미술학원이라도 다녔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학원 누나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뭐 그거야 이미 수십년 전에 물 건너간 거니까… 포토샵으로 깨작거리고 있다 보면 나도 드로잉을 좀 할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타고난 피와는 달리 수련을 안해서인지 원래 재능이 없는건지 아무튼 중학교때 만화 그린다고 깝죽대던 시절 이상으로 나아지지 않아 좀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다.
 아, 원래 하려던 이야긴 이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드로잉 스킬은 물려받지 못했지만(잠재능력이 있을지도) 예술적 센스는 물려받은 덕분에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면서 산다. 뭐 그게 아트웍일때도 있고, 글일 때도 있고, 가끔은 음악일 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교 때 포토샵과 영상을 좀 배워서(둘다 독학이어서 고급기능은 모른다) 그 둘은 좀 만지기도 하고 덕분에 그걸로 밥벌이도 좀 했는데 그렇다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뭐 남의 거 수정이나 좀 할 줄 알았지… 글은 그래도 인정받은 몇 안되는 분야 중 하나인데, 그것도 큰 상을 타거나 한게 아니라 그냥 소소하게 논술 점수 좀 잘 맞고 교내/영내(군대) 백일장 같은거로 수상 몇 번 하고 그정도여서 내세울만한 게 1도 없다. 브런치도 까이고… 아무튼 그래도 글은 키보드만 두드리면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수월하게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분야이긴 한데 사실 내가 글을 진짜 잘 쓰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걸로 밥벌어먹겠냐 하면 그 수준도 아닌것 같고 해서 저는 글쓰기가 재능입니다 하기엔 좀 쑥스럽고 그렇다.
 어쨌거나 아트웍이나 글은 그래도 아~주 못 하는건 아니라서 그냥저냥 하면서 내 ‘예술적 욕구(?)’를 충족하곤 하는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었고 지금도 전혀 못한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잠깐 다녔는데 바이엘을 하다가 피아노 학원이 이사를 가버려 끊은 이후로 나는 어떤 악기도 배우거나 다루지 못했다. 아, 고등학교 때 풍물동아리를 했지만 뭐 그거야 활용성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도 음표를 못 읽는데 뭐. 물론 음악 못한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음악 분야에도 그놈의 ‘예술적 욕구’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할 줄 아는게 쥐뿔도 없는데 왜 음악은 만들어보고 싶은 건지. 세상이 좋아져서 나같은 음악고자도 다룰 수 있는 개러지밴드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도 있고 여기저기에 악기들도 널려 있지만, 다른건 투닥투닥 하다보면 결과물이 나오던데 음악만큼은 도대체 그게 잘 안 된다. 내가 기준이 너무 높나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럴듯하긴 해야지. 근데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도 잘 안되니 이게 참 답답할 노릇이다.
 글쎄, 음악과는 일절 관련 없는 사람이 왜 음악 못 만드는걸로 스트레스를 받나 싶겠지만(사실 스트레스까진 아니고) 나도 좀 잘했으면 좋겠다 싶은 열망이 있고 음악 잘 하는 사람 보면 부럽고 하는게 아무리 봐도 욕심 같은 내 심정이다. 뭐 음악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음악은 특별히 좀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그럼 왜 안 하나? 그러게. 끈기가 없어서인지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무튼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며(코드 몇 개 잡을 줄 아는 걸로 ‘기타를 칠 줄 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것 같다.
 결국 의식의 흐름대로 아스트랄한 글이 되어 버렸지만, 아무튼 창작욕이란 건 괴롭다. 내가 그 창작욕을 충족시켜 주지 못함에도 그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걸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나는 이 글을 쓰기 21시간 전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나왔다). 이게 다 재능 없이 센스만 물려준 아버지가 문제… 가 아니고 아무튼 앞으로는 이 창작욕을 좀 풀어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프로의 세계로 넘어 오면서 나는 아마추어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그걸로 밥벌이는 불가능하고 밥벌이와 무관한 일은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학교에 오면서 거의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해내야 하겠지만 가끔은 내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싶다. 어차피 이젠 그걸로 밥벌이를 하면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철저히 취미가 되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욕심부려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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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ian

회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생각하는 건지, 요즘따라 유난히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예전 내가 회사다닐 땐 한참 바닥에서 구르던 내 친구들&그때의 직장 동료들도 이제는 팀장이니 이사니 하는 으리으리한 직함들을 달고 있으니, 나도 계속 회사를 다녔으면 저런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직함을 달고 지금 살아가고 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회사를 계속 다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아직도 미련을 갖고 있는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제 돌아갈 수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한 만큼 오히려 이젠 더 아무렇지 않게 ‘소설’을 써 볼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오래간만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이지만, 내가 평소에 뭐 의미있는 일을 얼마나 한다고…

2012년, 내가 예신을 안 다니고 직장생활을 관둘 마음 없이 회사를 다녔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새해를 맞이할 당시의 회사는 다닐 수 없었을 거다. 3월에 회사가 문을 닫았으니까. 실업급여를 받게 된 것은 변함이 없었을 거다. 내가 내 손으로 회사 사정에 의한 권고사직을 신고하고 퇴사를 한 덕분에, 나는 2012년 3월부터 2개월간 고용보험공단에서 공돈을 받으며(사실 공돈도 아니었다. 엄청 귀찮은 일이 많아서)신나게 놀러 다녔었다. 뭐 물론 예신을 안했더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었겠지. 당시에는 장기적으로 회사를 다닐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시늉으로 구직활동을 하면서 팀장 혹은 본부장 직함을 달게 된 예전의 상사들을 여럿 만나 명함과 식사대접(?)을 받으며 한량생활을 했었다.
뭐 그때에도 학교 입학준비를 한다고 해서 마냥 놀 수는 없었다. 벌어놓은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니까. 뭔가 일을 하긴 해야 했는데 마침 내 첫 회사에서 같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광고주(!)가 된 친구의 연락으로, 내가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그 회사의 프리랜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순수 재직기간으로는 가장 오래 다닌 회사였기도 했고 첫번째 회사의 기억이 너무 좋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흔쾌히 수락을 했다.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로…
아마 내가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었으면 거기 눌러앉았을 거다. 사실 처음 퇴사할 때도 반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몸담고 있던 팀이 공중분해되면서 팀 막내였던 나 또한 붕 뜨고 말았다. 함께 일하던 윗사람들이 모두 회사를 떠나고, 나는 이름만 전과 같은 팀에서 다른 팀이었던 사람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이미 팀원이 하나하나 떠나가던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 붕 뜬 분위기의 산물이었던 것 같지만)이 들어 굳이 관둘 이유가 없는 회사를 과감히 나왔다. 물론 그 이후 여기저기 헤메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회사 자체에 대한 기억은 너무 좋은 곳이었기에 프리랜서로나마 재입사를 했었고, 사실은 계속 다니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리고 재입사를 하면서 새로 만난 팀원들 또한 매우 좋은 이들이었다. 대행사란 게 뭐랄까, 갑의 횡포(?)에 시달리다 보면 전우애 같은게 생기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전우애가 생겨 짧은 시간 안에 두루두루 팀원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능력들도 있었고… 프리랜서 계약이 끝난 후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술을 한잔 한 뒤 ‘계속 같이 다니자’라고 말씀해주신 분도 있었던 만큼(그분은 안타깝게도 얼마 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었다.
아무튼, 만약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그 마지막 회사(이자 나의 첫 직장)에 계속 다녔었겠지. 뭐 워낙 퇴사를 밥먹듯이 했었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생각으론 꽤 다녔을 것 같다. 내가 좋아했으니까. 물론 추억보정으로 좋은 기억만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거긴 괜찮았다. 내가 몇달 다니다 관둔 여러 곳에 비하면 훨씬.
그렇게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은 차장 쯤 되어 있겠지. 2012년 당시 내가 5년차였고 지금 그때로부터 6년이 지났으니까, 벌써 나도 11년차 직장인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차장 혹은 부장급? 에이전시는 직급은 팍팍 올려주니까(4년차때 이미 명함과장도 달아봤었다)그정도는 하고 있지 않을까. 뭐 팀장 정도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니 그때 팀장님들 중 몇은 지금 내나이 정도기도 했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정말 내가 나이를 많이 먹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내가 무사히 회사를 때려치우지 않고 다녔더라면 그 정도의 직급이 되어 있을 것이고, 셀프브랜딩이 중요한 업계다 보니 내가 10년 전에 생각했던 꿈 정도는 이뤘을 수도 있겠다. 10년 전 꿈이 뭐였냐고? 테드 같은 데서 스피치를 하는 거였다. 큐시트 같은 거 하나 들고 사람들 앞에서, 내 경험과 가치관을 이야기해 주는 게 내 10년 전의 꿈이었다. 언젠가 그 꿈 이야기를 하면서 조만간 강론을 하게 될테니 어쨌거나 꿈은 이루게 되겠다는 소릴 했는데, 아무튼 내가 여기 있지 않고 회사를 다녔더라면 그런거 한번 할 정도의 인간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래도 첨단에 서 있는 업계이니 업계 중진 정도 되면 할 말도 많을 거니까.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했으면 나만의 특성(?)같은것도 생기지 않았을까. 무슨 분야의 전문가라든지, 어떤 프로젝트에 특화되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대표 프로젝트 같은 것도 생겨 있겠지. 뭐랄까, 내가 회사를 다닐 때엔 절대 풍길 수 없었던 전문가의 포스 같은 것도 갖출 수 있겠고. 날카로운 질문들도 던질 만한 소양도 있고, 나름대로의 강의 비스무리한 걸 이끌 만한 경험도 쌓았을 거다.
생각을 하다 보면 끝도 없다. 방송 같은데 나올만한, 자유분방한 인테리어의 사무실과 회의실에서 아이디에이션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기기들에 둘러쌓여 ‘비즈니스맨’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겠지. 무슨 잡지나 칼럼 같은데다가 업계 이야기 기고도 하고, 개인 블로그 같은데다가 이야기도 썼겠지. 요즘 브런치가 계속 리젝퇴어서 짜증이 났는데, 아마 내가 회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까일 일도 없었을 거다. 그들이 좋아하는 분야인 마케팅/IT업계의 10년차 직장인이니 말이다.

막 떠들다 보니 망상이 되어 버렸다. 너무 장밋빛으로만 그렸나… 뭐 상상인데 안좋은 그림 그려서 뭐하나. 아무튼, 회사를 계속 다녔더라면 하는 생각은 유난히 자주 들고, 11년차 직장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내 모습에 대한 상상도 계속 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이 팍팍한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겠지. 그 점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음으로써 감사드릴 수 있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적어도 난 굶어죽을 걱정, 처자식 먹여살릴 걱정은 안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렸을 적부터 꿈꿔왔던 분야, 그리고 내가 스무살 때부터 계속 관심을 가져왔던 분야의 전문가이자 업계 핵심 관계자로 살아갈 수도 있었던 나의 또다른 ‘현재’에 대한 상상은, 그것이 이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즐거운 망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더 크고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지만, 그 ‘전문가’의 모습이 내가 동경하던 모습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게 그 동경하던 ‘전문가 김준휘’의 모습은, 이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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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가치

 얼마전 모 유력 정치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밝혀도 되긴 할텐데, 선거기간이라 괜히 쫄아서 ‘모’ 정치인이라고만 쓴다) 꽤 좋아하는 분이긴 하지만 일부 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해서 한시간 조금 넘게 진행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연을 통해 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논리적 설명을 통한 ‘설득’의 경험 말이다.

 (논리적) 설득은 꽤 일상적인 행위이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뭐 사실 우리가 말과 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목적 중의 상당수가 이 ‘설득’을 위한 거니까, 설득은 결코 신선한 경험일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단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에선) 늘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 논리적 설득의 경험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건, 내가 요즘 얼마나 논리적 설득에서 멀어져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설득이 일상적이어야 할 세상에 살면서도, 너무 설득과 무관계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권위에 의존해 윽박지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슨 지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받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얻고 마음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윗사람이 시켜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을 하는데 왜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일 자체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외부적인 데서 동기(motivation)를 찾아야 한다. 그게 대부분은 ‘돈’이다. 사람들이 윗사람 욕, 갑질하는 광고주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납득할만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알맹이 없는 번드르르한 결과물이 나오기가 십상이다.

 우리는 설득 대신 갈굼과 ‘쇼부(しょうぶ, 勝負)’에 익숙하다. 뭐 그것들 역시 나름대로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정도(正道)의 설득과 조금 다른 건, 그것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내용을 통해 듣는 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건 결코 ‘스탠다드’라고 할 수 없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을 때에 한번씩 써먹을 수 있는 변칙 플레이 같은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설득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사바사바 해서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까라면 까 정신에 입각해 시키면 할일이지 무슨 설명이 필요해 같은 마인드로 일을 ‘하달’한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이럴진대,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수긍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사실 이게 다 권위적 사회의 결과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왜 수고스럽게 설명을 해주냐? 이게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니 설득을 당해본 적도 없고 당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도 없다. 세상이 이러니 정치도 수준높은 설득보다는 선동이나 프로파간다 위주가 된다. 유독 정치에 네거티브가 판치는 이유는, 설득을 해본적도 당해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굳이 귀아프게 설명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거 빵 터트려서 주목받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일 게다. 아니면 정말 설득할만한 ‘컨텐츠’가 없거나.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간만에 장시간 정치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참 말 잘하네’ 정도의 감상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스피치를 통해 나는 내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 정치인의 일부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귀가 얇은 건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사회에 살면서 이정도로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고 설득을 당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놀아났다’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내가 놀아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 정치인은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고,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적어도 나는 그 정치인이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를 탈락시킨 이들, 나를 욕하는 이들, 나에게 업무나 과제를 던진 이들 그 누구도 왜 자기가 이 일을 내가 하기를 원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한 설명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 의견의 옳고그름을 떠나 나는 인간적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정치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설득의 가치는, 설득당하는 이가 전인적(全人的)으로 설득하는 이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갈굼과 쇼부가 조직과 비즈니스의 방식이라면, 논리적 설득은 인간의 방식이다. 인간이 인간의 방식으로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을 조직의 일원이나 비즈니스 파트너(혹은 갑과 을)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한다. 배울 만큼 배운 인간들이 왜 배운 걸 써먹지 않고 왜 말초적인 권력관계나 이익관계로만 소통하는 것인가. 설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설득하고, 설득당해야 한다. 그게 말과 글을 쓰는 인간의 방식이다. 생존과 먹이로 소통하는 동물의 방식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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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 생각과 행동들을 다 ‘관찰’하고 있는 것이 오직 나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꿔, 나는 나를 다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너무 당연하게 나는 나를 잘 알지! 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요 몇년간 이어진 생각들을 통해 나는 나를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나에 대한 생각들을 꽤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들에 대한 내부적인 피드백(반성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걸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 내가 왜그랬지’ 정도의)도 하고 있으며,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며 내 모습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기평가를 하기도 한다.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하며, 어떤 것이 바람직한 모습과 방향일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떄로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문제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양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을 것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하면서(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들은 점점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이렇게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내 모습이 내가 ‘창조해낸’ 더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의 본질 바깥에 있는 껍데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레이어’처럼, 내 본모습 위에 무언가를 얹어놓고 그것까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전까지 내가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또 내보여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 나는 과연 솔직한 사람일까. 다른 이에게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인간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내가 솔직하게 내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사실은 ‘레이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의 솔직함 자체에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 내 표면적인 경험(=과거)을 제외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해진다.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많은 것을 그냥 void로 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많은 부분이, 나 자신도 접근할 수 없도록 제한이 걸린 채 나머지 부분만을 보며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예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창조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그것이 본질에 기반하더라도). 그런 생각들을 계속하다보니, 이건 뭐 데카르트도 아니고 자꾸 극단적인 방향으로 의심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정도까지 내가 허상의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 정도는 있다. 뭐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여기까지 오고 만 거지.

 아무튼, 내가 들여다보고 내가 또 내보여주는 나의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제한된 일부분에 불과하고 나는 사실 나를 잘 모른다는 것 자체는 확실한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내가 모른다면, 남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상담도 하고 그러나보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제한적으로만 드러낸다면, 내가 드러내는 만큼만을 볼 수 있는 남이 나보다 많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뭐 그런 것이 심리학이고 정신의학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썩 미덥지는 않다. 나도 모르는 걸 남이 어떻게 알아 하는 생각과 함께, 결국 뭔가를 알아낸다고 해도 그건 그냥 추론에 불과한 거잖아 하는 생각이 그런 학문들에 대한 신뢰를 가로막는다. 사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굳이 알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요인이든 내부적인 동기부여든 내가 모르는 내 모습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걸 할 수 있도록 해 주는건 나 이외의 어떤 것(사람이든 학문이든)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든다. 물론 내 생각에 그건 단순한 ‘넛지’이상의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알아가야 하는 역할은 나 자신의 몫이겠지.

여담.
사이버스페이스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이런 글을 싸지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상인격’같은 것도 실현되지 않을까? 데이터형과 AI만으로 구현된, 실체 없이 인간을 ‘에뮬레이트’하는 인격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럼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 가상의 인격을 실제라고 생각하면서 소통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AI의 발전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지만, 만약 이렇게 인간의 (물리적이 아닌)외형적인 모습들을 가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에뮬레이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정리하면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생각했던 여러가지 것들이겠지. 그런 점에서 이 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그냥 글을 쓰는 동안 했던 생각의 ‘나머지’에 불과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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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착취와 미투

 요즘의 화두는 역시나 미투다.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가해사례를 보며 새삼 그 심각함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쫄보로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기도 한다. 나도 충분히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는(예전에는 남성 전체를 이렇게 매도하는 것 자체에 크게 거부감이 들었었는데 이젠 뭐 아니라고도 못할 상황이 되어버리고 있다. 워낙 멀끔한 사람들이 가해자로 많이 등장해서) 작금의 상황 속에서 도대체 저들은 간도 크게 어떻게 저런 짓을 저질렀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걸 보면, 나는 역시 그런 짓을 저지르기에도 부족한 위인인 것 같다. 뭐 쓸데없이 간만 커서 해악을 끼치는 것보다 쫄보로 사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성폭력 자체의 측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고(어떤 측면으로든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고,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 무슨 이해의 여지가 있는가) 미투 사례 안에서 보여지는 계급적 측면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지금 터진 사례들이 대부분 권력자에 의한 것이지 않은가.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있는 인물들에 의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 남성에 의한 폭력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성폭력으로 이어진 것이지 ‘아랫사람’전체의 입장에서 봤을 땐 어떤 방식으로든 그 권력자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양반들이 아랫사람들을 존중해주다가 갑자기 여자들한테만 돌변해서 강압적인 관계를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뭐 만약 그렇다면 그것 또한 문제이겠지만, 아무튼 내 생각엔 아랫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가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이 희석되는 것 같아 다소 조심스럽지만, 작금의 상황은 분명히 상하관계의 폐해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남녀 간의 사회적 위치도 그 문제적 상하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크게 보았을 땐 사회 전체적인 상하관계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 이번 미투 사태들인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착취하고 있는 사회, 애당초 그 윗사람 아랫사람이란 것도 누가 결정해주었는지 모호한 그 관계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강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다. 지금 미투를 통해 드러나는 추악한 광경들은 그 상하관계에서 발생하는 착취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들이다. 사실 이 정도로 성적 착취 문제가 커진 것에는 우리가 얼마나 성을 가벼운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저지르는 착취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외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유난히 다른 나라보다 심한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그 상하관계에 기반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큰 해악덩어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꼰대’에 의해 고통받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을’들이 ‘갑’에 의해 절망하고 있는가. 출생년도, 입학 혹은 입대년도, 경력, 계약서상 관계 등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우리는 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위아래를 구분짓고 그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파워를 정당화한다. 물론 구조적으로 그런 관계 안에서 일정한 힘의 작용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필수불가결한 수준을 넘어서는, 힘의 남용이 너무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라고 준 힘이, 권한이 아닐텐데도 많은 윗사람들은 그것을 사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용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이번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이 ‘윗사람에 의한 아랫사람의 착취’ 자체가 조명받았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바람은 내가 성폭력의 직접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많지 않아 갖는 나이브한 생각일 수도 있다.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는 당장 직면한 위협부터 해결되어야겠지(성적 위협이 ‘일상적’이란 것을 재확인할 때마다 놀란다. 일부 여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란 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조직내 지위에 기반한 부당한 압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우리 사회 조직 전체에 있다. 이 점은 미투를 통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강물처럼 흐르는, ‘선배나 윗사람이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없어져야 한다. 윗사람에게는 업무지시만 받으면 되었지 커피를 타다 줄 이유는 전혀 없다. 회사에서 일만 하면 되었지 부장님이 주도하는 회식에 무조건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윗사람의 추근덕거림과 그 이상의 행위에 대해 눈을 질끈 감고 견뎌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전혀 없다. 하지만 커피를 타 주지 않으면,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더러운 손길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 피해는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라 당한 사람에게 온다. 법이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해주지도 않고, 설령 법의 보호를 받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당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애써 ‘이걸 드러내서 받을 피해보다 작은 피해’로 합리화하면서 감내해야만 한다. 그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사회 안에서 살아남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건 누가 봐도 문제적인 상황인데, 그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뭐 사회생활 하다보면 윗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 뭘 당해도 아랫사람이 문제가 된다. 부디, 이번 운동이 이 상하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까지 이어져 복종관계가 아닌 파트너십에 가까운 상호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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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노오오력이 아닌)노력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올림픽을 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사실 올림픽이란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이번이 뭐 특별히 남다른 의미가 있을 만한 것도 아닌데도(한국에서 하긴 하지만 나는 티비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다) 굳이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진짜로 나이가 들고 꼰대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 특별히 꼰대스러운 생각들은 아니지만, 올림픽을 보고 그곳에서 뛰고 있는 여러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노력’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뭐 말할 것도 없이, 화면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티비에 나올 만한(사실 그것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노력을 한 이들임에는 틀림없다. 금메달 스토리에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인 ‘관두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따위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남다른 노력으로 중계화면에 잡혔고 올림픽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일부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

 노력의 결정체들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뭐 나름대로는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그 인생을 건 노력과 일관성 앞에서 나는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노력과 나의 노력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매일같이 노력의 결정체들을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면서, 인생을 열심히 살기 위해 필요한 노력들을 ‘노오오력’ 따위의 말장난으로 지나치게 과소평가해버리고 마는 내 모습을 뒤돌아보며 성찰하게 된다. 그래,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언제 죽도록 노력해봤으며,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닐 정도로 처절하게 싸워 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인생을 너무 느슨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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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작가의 악필

난 악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글씨체가 구려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도 컴퓨터만 써 대서 글씨쓰기 능력이 쇠퇴하는 걸까. 가끔은 이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먹지 싶을 정도로 내 기준엔 개발새발 써서 주는데도 글씨 잘쓴다는 소리를 듣거나 적어도 악필 소리는 안 들으니, 도대체 얼마나 못 싸야 악필이라고 욕을 먹는건가 싶을 때가 있다. 악필인 사람들이 주변에 있긴 있으나, 좀 안 예쁠 뿐이지 알아먹는덴 지장 없을 정도던데. 아닌가?

 갑자기 악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연필쓰기를 하면서 글씨체가 변해가는 걸 보고 있는 중에 연필로 원고쓰는 소설가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나서이다.(의식의 흐름이…) 김훈이었나. 아무튼 요즘같은 시대에 아직도 원고지에 원고를 쓰다니 작가의 로망인가 싶기도 하고 장인정신 같은것도 느껴지도 하긴 하지만 그걸 받아보는 편집자들은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도 떠오르고 막 그렇다.(역시 의식의 흐름이…) 뭐 대(大)작가의 친필 원고를 받아서 영광입니다 하는 생각일까 아니면 이거 또 언제 보고 언제 치지 하는 직장인 마인드일까. 뚝 잘라서 한쪽은 아니겠지. 그래도 마냥 영광스럽게 그 원고를 타이핑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본다. 일은 일이니까.

 근데 진짜 그렇게 옮기는 글이 악필이면 얼마나 힘들까. 타이핑하는데 ‘해독’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얼마나 골치아플까. 옮겨야 하는 글이 어중이떠중이의 글도 아니고 무려 대작가의 글인데 악필 때문에 잘못 읽어서 오타라도 나면(사실 이건 오타가 아니라 오독이라고 봐야겠지만) 이건 또 무슨 부담인가. 뭐 악필까지는 아니더라도, 원고지로는 수백 수천장 써나가는 게 소설이니 글씨가 마냥 정자체는 아닐거고 그러다 보면 날라가서 아리까리한 글씨도 생길 만 한데 그런건 또 어떻게 하나. 괜히 지레짐작으로 때려맞췄다가,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써넣은 표현을 밍숭맹숭한 걸로 바꿔넣어 버리면 어떡하나. 뭐 이런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것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금세 연필이 닳아 또 날아가는 글씨가 되어 버렸다(이 글은 연필로 공책에 쓴 걸 옮긴 글입니다). 근데 진짜로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친필 원고는 편집자가 일일이 다 타이핑하는 걸까, 아니면 일단 손으로 쓴 다음에 작가가 직접 파일로 만들어 주는 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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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중독

활자중독이란 요상한 용어(?)가 있다. 뭐 정식 병명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신조어 같은 걸로 추정되는데, 그렇다 보니 어떤 게 활자중독인지 정의하는 것도 제각각인 것 같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활자중독이란 단어를 듣고 어떤 이들은 ‘아 내가 바로 이 활자중독이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런 인간들 중의 한 명이다.
이게 진단을 받는 병 같은게 아니라서, 내가 ‘활자중독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그 병명(?)에 걸맞는 증상(??)들을 찾아내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엔 음료수 라벨을 읽는 습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는데, 나는 음료수를 마시다가 별로 할 게 없으면 그 음료 캔에 써있는 글자들을 전부 읽는 습관이 있다. 그걸 대체 왜 읽냐고? 모른다. 모르니까 중독이지. 뭐 물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거나, 정말 갈증이 났거나 하는 경우에 그걸 읽고 앉아있지는 않지. 그렇지만 뭐 그냥 휴식을 하거나 하면서 음료수를 마실 때, 아니면 사람들과 앉아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을 때 나는 습관적으로 음료 캔의 라벨을 읽는다. 
사실 내가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안 지가 얼마 안 되었다. 그냥 읽고 있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음료수의 성분이나 공장 위치 따위를 기억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읽는 거다. 내가 이런 습관이 있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니들도 그러는지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십중팔구 미친놈 취급을 할 것 같아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 스스로도 이걸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이런 습관을 인식한 이후부터는 그걸 읽고 있다가도 의식을 하게 되어 버려서, 순수한 의도(?)로 그 짓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내가 활자중독인가? 뭐 활자중독이라고 하면 책을 닥치는 대로 읽거나 신문을 빠짐없이 읽거나 하는 따위의 모습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 뭐 꼭 그런것 같지는 않다. 책을 평균보단 많이 읽고 있긴 한 것 같지만, 독서가로 인식될 만큼은 아니다. 신문 역시 읽으려고 가져다 놓고 폐지함으로 직행하는 것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그런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뭐 물론 인터넷 따위에서 글을 많이 읽긴 한다. 근데 그건 남들도 다 그런거 아닌가? 심심하면 인터넷으로 뉴스 읽고, 블로그 읽고, 시시콜콜한 게시물들 읽고. 그런것들이 활자중독자의 증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고보면 내 특이증상(?)은 오직 그 음료수 라벨을 읽는다는 그것 뿐인 것 같기도 하다. 아, 설명서 다 읽는것도 있겠다. 나는 설명서 안 읽고 버리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많은줄 몰랐다. 하지만 설명서 읽는 건 활자중독이어서가 아니라 새로 장만한 물건의 기능을 확인하기 위해서인것 같은데.

뭐 아무튼 글자 참 열심히 읽는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해져서인지, 아니면 이제 기억력과 집중력이 감퇴되어서인지 읽은 것 중의 상당수는 그냥 ‘읽었다’는 것 이상의 기억으로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이건 어쩌면 영양가 없는 텍스트를 대량으로 공급해주는 스마트폰의 영향은 아닐까? 쿠키 컨텐츠 위주의 읽기가 생활화되다 보니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저장이 줄어들어 버린 건 아닐까? 아직도 글을 읽는 건 즐겁지만, 열심히 읽은 것들이 영 생각이 안 나고 입안에서 맴돌 때엔 조금 짜증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벌써 이렇게 깜박깜박하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