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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합대회’의 몰락

좋든 싫든 조직에 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에게 특강이나 ‘단합대회’조의 행사는 스트레스의 온상이 된다. 뭐 물론 그런 행사의 근원이 되는 조직문화를 내면화해버린 많은 ‘높으신 분들’이나 높지도 않은데 내면화만 해버린 정신승리자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팀웍이나 개인의 수준향상 등의 목적으로 강제소집되는 강연이나 행사는 수많은 이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때로는 더욱 고귀한 목적을 위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소환되기도 한다. 그 비근한 예로는 대한민국 20대 남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예비군 훈련’이 있겠다.

이런 집단행사가 스트레스의 온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하다. 강제로 끌려와야 하니까. 조직 내에서 많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분의 판단에 의해, 혹은 ‘그냥 좋겠다’싶은 한 마디 때문에 명줄을 건 많은 이들이 자유시간을 반납한 채 어딘가에 모여 의욕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물론 많은 집단행사는 작당한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간식이나 기념품을 준다든지, 회사의 경우라면 근무시간 인정을 해준다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왜 참여안해’라는 마인드로 열리는 집단행사는 당근도 없이 내 멘탈에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 물론 집단행사를 추진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누가 사람들 괴롭히려고 그런 번거로운 일을 조직하나. 자기 딴에는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자신의 수고를 들여 일을 추진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기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그 일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추진자가 생각하는 대로의 도움은 절대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배움은 다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배워야 할 것, 좋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푸쉬를 하는 거다. 딱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지. ‘주입식 교육’. 학습 내용에 관심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들을 앉혀놓은 다음 앞에서 막 떠든다. 그러면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배우기 전에 동기부여는 전혀 없고,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강제성만 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고, 우리가 말하는 수재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왜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니까’. 그건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이유이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기 위해 학원에 가고, 학교에선 잔다.

사회에서 경험하는 많은 집단행사도 이런 주입식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의 발전이나 조직의 발전. 뭐 그런 것들을 준비해 놓고 그냥 푸쉬를 한다. 정말 우리에게 좋은 거면 어련히 알아서 참석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를 염려해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높은 분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우리는 선택권 없이 그 ‘좋은 기회’에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판단해 참여했다면 충분한 동기를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그 행사를, 끌려왔기 때문에 어떠한 동기부여나 참여의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억지로 하게 된다. 학교에서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조는 것처럼, 행사나 특강에 온 많은 이들도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버린다.

사실 집단행사나 주입식 교육은 모두 우리의 20세기를 지배했던 집단주의의 산물들이다. 충분한 수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계몽하는 것. 숙련되지 못한 대량의 인력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 이것을 위해 우리는 몇몇의 집단으로 분류되었고 그 집단의 단위로 컨트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나친 ‘개인주의’를 우려할 정도로 사람들은 개인화되었고,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의 실현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들의 역량도 향상되었다. 과거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없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학생’ 혹은 ‘직장인’이라는 카테고리로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든 거다. 그런데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여전히 ‘학생’ 혹은 ‘직장인’의 카테고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는 이들에게 획일화된 방법 하나를 강제하니 그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지금 시대의 양성은 ‘방법’이 아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스트레스의 근원인 수많은 집단행사는 바로 그 ‘방법’들 중의 하나다(그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집단행사는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자). 목적은 공감하나 그 시기와 방법에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선택권’이다. 집단행사에 대한 선택권을 주면, 그건 공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그 정도도 동기부여를 못하는 사람은 관둬야지. 하지만 그 정도 동기부여는 된다고 가정하면,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기회를 활용하려 들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그 행사의 효과도 적절하게 발휘될 것이다. 생각보다 스스로 하는 일과 억지로 하는 일의 능률 차이는 크다. 그렇게 적절히 기회를 활용하는 사람은 하고, 아닌 사람은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것도 안하는 사람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야박한 소리이지만 의지가 없는 사람은 딴길 알아봐야지. 이렇게 해야만 양성의 결과가 내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을 통한 세뇌가 아니라 진짜 내면화. 그거 해야 진짜 오래가는 인재가 될 것 아닌가? 언제까지 존버해서 승리한 개살구들만 내놓을 것이냔 말이다.

* 사실 특정한 배경이 있는데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뭔소리야 싶은 알쏭달쏭한 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힌트는 다 있으니 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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