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미분류

와칸다 포에버

몇년 전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을 때, 무슨 대단한 흑인 영화인양 호들갑을 떠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블랙팬서>는 재미있는 영화였고 부족전쟁 같은 느낌의 스토리나 비주얼 역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흑인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할 만한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이 영화를 개념영화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나에게 블랙팬서란 아프리카 스킨을 쓴 헐리우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로 묶일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아니면 그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혀져 있던 어떤 가치들를 담은 상업 컨텐츠가 많이 나온다. 제일 자주 보이는 건 아무래도 페미니즘 관련 컨텐츠이겠지. 이건 내가 뭐 딱히 코멘트할 것도 없고 코멘트할 자신도 없으니 넘어가지만, 아무튼 요런 것들을 내세우며 개념 컨텐츠인양 하는 것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 그건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하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다.

블랙팬서를 예로 들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와칸다 포에버’ 풍의 스타일이 잔뜩 발라져 있지만 그 기반의 구조 자체는 유럽인이 비유럽인들을 보는 전형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그런 거다. 사실 비브라늄(맞나?)이 넘치는 비밀의 나라 요런 세계관은 딱 ‘엘도라도’의 그 세계관이다. 유럽인들이 남미 와서 황금의 나라 찾던 그 세계관이 바로 블랙팬서의 세계관인 거지. 그리고 그 비밀의 나라가 과학이 엄청 발달해서 유럽인들을 압도할 정도라는 설정 역시 ‘신비의 동양 무술’ 뭐 이런 걸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시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웅들이 힘을 모아 세계의 위기를 막아낸다 이런 서사 역시 전형적인 서구 영화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세계관이 이런데, 고작 흑인 캐스팅이나 아프리카 스타일 소품 따위로 흑인 영화의 새 지평을 연 것인양 하고 있는 건 진짜로 그냥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한 거다.

사실 마블 영화들이 좀 다 이렇고, 한국 영화 중에는 CJ영화나 그 계열 드라마들이 특히 이런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인 것 같다. 인종, 여성, 역사의식 등의 포인트들을 살짝 발라놓고 그게 무슨 대단히 의식있는 컨텐츠인 양 하는 것이지.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 하나가 게이라고 해서 그게 그 영화의 성격을 규정지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화가 정말로 그런 열린 관점에서 이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것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모습들이 ‘이레귤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그런 소수자 이슈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뭐 요즘 보면 딱히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다만) 근데 그걸 극의 흐름과는 별개로 노골적으로 깔아놓은 건 그냥 그게 ‘세일즈 포인트’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갑자기 주인공이 최신 스마트폰을 브랜드가 잘 보이게 들고 기능자랑을 하는 PPL처럼 말이다.

창작자의 예술적 기질보다는 기획자가 배치하는 흥행 포인트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의 컨텐츠 시장에서, ‘개념작’소리를 들으며 잘 팔리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예술적 완성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업 컨텐츠니까 잘 팔려야지. 근데 잘 팔리는 걸 만들기 위해 ‘잘 선정한’ 주제를 송곳처럼 배치해 놓고 그게 무슨 진정성 있는 문제작인양 생색내고 그걸 소비하면서 개념인인양 드러내는 요즘의 현실은 과연 이 자들이 진짜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시대에 진정성을 찾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스킨’만이 문제들의 본질인 양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시대에, 깊이 있는 생각들은 시간낭비 취급을 받으며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은 좋아요 한 번으로, 인스타그램 관람인증 하나로 해결되는 건 아닐 텐데.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