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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위기

 일반적으로 살아온 내 나이 또래, 혹은 내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의 입장에서 ‘굶어 죽을 판’이란 말을 피부로 느낀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다들 태어나면서부터 대학교 졸업 때에 이르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쭉 부모 세대의 지원과 보호 안에서 살아가게 되며 덕분에 술값이 없어서 술을 못 마신 적은 있어도 밥 사먹을 돈이 없어서 생존위협을 느낀 경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물론 어디까지나 대학 졸업해서 직장 취직하는 ‘일반적인’케이스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일생에 딱 한 차례 생계비 문제로 ‘생존위협’을 느낀 적이 있다.

 2007년, 나는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을 한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원래 거창한 ‘미국 어학연수’ 계획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무산되어버린 후, 졸업 후 서울에서 살아야 하는 전공 특성상 서울 정착자금을 번다는 명목으로 장기간 모 문구유통점의 ‘용역사원’으로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알바’를 하던 1년간의 생활은 썩 사정이 좋지 못했다. 어차피 알바 월급이란 것이 거기서 거기인지라(그래도 낮에 일하는 알바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소득 자체가 넉넉지 못했고, 또한 알바의 목적 자체가 당장의 생존보다는 졸업 후 서울 정착을 위한 돈벌이의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최대한 모을 수 있는 만큼 돈을 모아 놔야 했다. 내 경우 집에서의 지원은 전무했고(지원이 있었으면 애당초 알바를 하는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 연고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던 터라 당장 거처부터가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초반엔 친구 집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하던 곳이 코엑스였기 때문에, 교통비를 아낀다는 명목 하에 인근의 고시원을 알아보았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기본적으로 다른 동네보다 월세가 5~10만원가량 비쌌는데, 어차피 다른 동네에서 출퇴근하면서 교통비 쓰는 것을 감안하면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는 계산 하에 대치동(!)의 30만 원짜리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거지 마련에 30만원이라는 거금을 매달 들이붓게 된 상황에서, 생활은 당연히 극도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비싼 강남에서 일하다 보니 식비가 큰 부담이었는데, 한 끼에 5천~7천원씩 30일이면 벌써 식비만 50만원이었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쳐도 30만원인데, 거기다가 가끔 술 한잔씩 하고 필요한 물건(혼자 살면 생각보다 필요한 것이 엄청나게 많다) 사고 하면 돈 모으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마는 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단 식비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처음엔 도시락을 싸 오는 다른 동료에게 빌붙으면서 식사를 해결했는데, 고시원에서 ‘밥’은 제공해 주기 때문에 그 밥을 싸 온 다음 구색용으로 통조림이나 김을 챙겨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다른 분들이 양해를 해 주었기에 가능한 방법이긴 했지만, 굉장히 염치없는 짓이긴 했다. 그렇게 좀 살다가, 이마저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렵게 되자 편의점 음식으로 한끼를 때우면서 생활을 해야 했다. 라면에 삼각김밥이면 밥집에서 사먹는 식비의 절반 정도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먹고 힘쓰면서 일했었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고생하면서 알바를 1여 년간 한 덕분에 나는 반지하이긴 하지만 내 세간살림이 들어찬 월셋방을 가질 수도 있었고, 약 600만원을 모은 상태로 마지막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1년 일해서 600만원 모은 게 별로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알바로 모은 돈이었다는 점과 위에서 언급한 모든 생활비를 매달 지출해가면서 모은 것을 감안해볼 때 내 입장에서는 ‘영혼까지 다 끌어 모았다’ 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서 생활비 명목으로 추가대출을 받은 100만원까지. 이만하면 졸업준비는 다 마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2007년 9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아, 중간에 두어 차례 친구가 다니던 영상 프로덕션의 조연출을 하며 3~4일 정도 일당을 받긴 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정기적인 수입을 1원도 올리지 못했다.

 이 무소득의 타격은 생각보다 컸다. 일단 내가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월세는 꼬박꼬박 계속 나갔다. 몇 달 월세를 내지 않기도 했지만 바로 윗층에 집주인이 살고 있는 처지에 몇 달이고 버티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식비도 계속 나갔다. 집이 생겨 취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는 해도 변변찮은 반찬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상황에 매일 맨밥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도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한참 쪼들리던 때 밑반찬에만 먹는 밥이 지겨워서 일주일에 한번 중국집에서 ‘탕볶밥’을 시켜먹던 기억이 나는데, 무슨 요일 이벤트라고 해서 볶음밥 가격에 탕볶밥을 먹을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복학 후 2년 반 동안의 학자금 대출의 상환기한이 돌아오고 있었다. 원래는 4학년 2학기를 마치면서 취업을 하게 되면 갚기로 되어 있던 것들이었는데, 1년을 휴학하다 보니 취업 후가 아니라 학기 중에 상환기한이 닥쳐 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그나마)감당 가능한 수준이었지만, 곧 6개월 단위로 상환금액이 두 배씩 불어났다.

 이런 불가피한 문제 이외에도, 무소득이라는 환경에서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을 그만두니 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할 때엔 의외로 돈을 잘 쓰지 않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터에서 보내는데다 근무중의 음료 같은 것도 내가 사는 것보다 내 위의 정직원들이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오후 조를 하면 밤 10시에 끝나는 스케줄 덕분에 술 마실 시간이 되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어서 돈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고시원에 사니 어지간한 살림은 늘릴래야 늘릴 수도 없었으니 컴퓨터나 전자제품 따위에 돈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을 딱 관두고 학교에 다니니 돈을 쓸 일도, 돈을 쓸 시간도 풍부해져 버렸다. 1주일에 이틀 학교를 갔는데, 학교가 (이제는 세종시가 된)충남 조치원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는데 교통비가 들었다. 거기다가 이틀이기 때문에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필수적으로) 술값이 들었다. 거기에다가 또 4학년이니 음료나 군것질거리를 사줄 사람은커녕 내가 사줘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약 3~4개월 학교를 다니면서 엄청나게 돈을 썼다.

 학기가 끝났다고 해서 돈 쓸 곳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말 그대로 ‘백수’였기 때문에 남는 건 시간밖에 없었다. 내 집이라고는 하지만 환경이 썩 좋지 않은 방에서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처박혀 있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계속 어딘가는 쏘다녀야 했고, 계속 지출이 발생했다. 그리고 백수 초기만 해도 잔고가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쓰고 다녔다. 그 결과 나는 ‘채워지지 않는 잔고’ 에 대한 두려움을 그 때 알게 되었다. 사실 뭐 그전에 용돈 받아서 살던 시절에는 잔고가 바닥나도 걱정이 없었다. 거처와 식사는 선불 완납된 기숙사에서 해결 가능했고, 전화 한 통으로 돈이 ‘충전’ 되던 시절이었으니.

 백수로 살던 시절의 지출은 돈을 한참 벌어봤던 지금 입장에서 보면 참 소박하긴 했다. 역시 밑반찬 위주의 식단에 질려 가끔 시켜먹던 중국집, 가끔 술, 그리고 가끔 예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가게 되면서 쓰는 교통비와 간단한 지출, 무슨 공짜 강좌 따위에 참석하거나 취업 때문에 면접 같은 곳에 나타나는 교통비나 식비, 온라인 게임 1개월 정액요금 등… 지금 생각하면 어디다가 돈을 썼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돈은 깨알같이 빠져나갔다. 한참 돈이 쪼들리던 시절에는 뜬금없이 등산을 하러 동네 뒷산(그래도 해발 600m나 하더라)에 올라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7만원짜리 자전거를 사서 한강 자전거도로를 쓸고 다니는 짓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 7만원짜리 자전거를 거의 3달 가량 매일 끌고 나가 돌아다니면서 시간 죽이기와 이동을 해결하고 다녔으니 훌륭하게 제 값을 해낸 기특한 자전거였다. 물론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말 그대로 쇳덩어리 자전거라서 오로지 평지만을 달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어쩌다 보니 굉장히 유쾌하게 그 시기를 회상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유쾌한 시기는 아니었다. 내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시절엔 필름 살 돈이 없어서 한컷 찍는 데 온갖 고민을 했던 때이니 말이다(36컷 필름이 한 통에 싸게 사서 1~2천원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잔고의 압박이 다가오는데 일을 할 수 없는 괴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우선 나는 대한민국의 취업시장에 대해 대학 시절부터 근거 없는 지나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졸업이 닥쳐오니 대한민국에서 대졸자로 취업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몸소 깨달아야만 했다. 전공이 광고기획인지라 기업 마케팅 부서나 광고대행사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처음엔 겁도 없이 기업 마케팅 부서를 두드리고 다녔다. 하지만 그야말로 솔직한 서류에, 솔직한 학점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자기소개서(그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로는 서류심사 문턱조차 넘기 힘들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대행사 쪽은 죽어도 가기 싫었다. 결국은 애꿎은 내 청춘의 시간들만 잔고와 함께 계속 소모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르바이트도 그 시점에서는 하기가 힘들었다. 취업준비생이란 신분의 특성 때문이었다. 방학중이나 휴학중에는 내가 굳이 일을 만들지 않으면 스케줄이 없으니 하루의 알토란 같은 시간을 점유하는 알바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취업준비기간에는 그게 힘들다. 어쩌다가 서류 붙어서 면접이라도 오라고 할 때에 알바를 하고 있으면 면접 참석에 지장이 생긴다. 알바 입장에서 입사면접이 있으니 오늘 하루 빼 달라는 소리는 나를 빨리 잘라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지라(물론 오래 일한 입장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섣불리 알바를 구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또 취업준비생이라는 입장은 고용주 입장에서도 썩 달갑지 않았다. 취업준비생이란 건 말 그대로 취업이 되면 언제든지 사라져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거의 모든 알바구인 글에 ‘장기근무 가능자 우대’ 란 말이 씌어져 있는 상황에서 언제 그만둘지 모르는 취업준비생이 그럴 듯한 알바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는 상태에서 맞게 된 2008년 5월. 사정은 그야말로 최악에 치달아 있었다. 잔고는 오늘내일을 바라보고 있었고, 위기감에 구해본 몇 군데의 알바자리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말았다(키 작은 게 그때처럼 한스러운 적이 없었다). 버스비조차 부담되는 상황이 되어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곳 이외의 외출은 불가능해졌고, 당연히 온라인게임 정액요금도 낼 수가 없었다. 취직한 친구들 덕분에 하루짜리 알바 같은 걸 몇 개 할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 결국 나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김영삼 정부의 심정으로 집에 구원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IMF와는 달리 우리 집엔 나를 구제해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없었다. 집에서 돈이 왔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왔더라도 (부모님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큰 도움은 안 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잔고위기의 상황…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반지하 방에 앉아서 맞이하는 이 절박한 상황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매일 인터넷 뱅킹을 열어 잔고로 버틸 수 있는 기한을 계산하고,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의 잔량을 확인했다. 내다 팔 물건이 없나도 확인해 보았지만, 내다 팔 만큼, 그리고 내다 팔아서 만족할 만큼 돈을 받을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 시간이 지난 후 근처 친구 집에 가 밥과 술을 얻어먹고, 자전거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 즈음 위기감이 고조된 나는 결국 기업 마케팅팀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대행사 쪽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행사 업계라지만 아무 관련경력도, 공모전 수상경력도 없는 신입인력을 덥석 낚아갈 회사는 흔치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바닥을 보이는 잔고에 위기감을 느끼고, 답장 없는 지원메일에 좌절하면서 5월을 보내고 있었다.

 6개월을 기다린 반가운 소식은 얄밉게도 한꺼번에 찾아왔다. 먼저 훌륭한 알바 자리. 친구네 회사에서 재택으로 업무를 해 줄 인력을 구하는데, 그곳에 연락이 닿았다. 대학교 동기이니 면접 따위는 가볍게 넘어갔고, 사무실에서 업무 브리핑을 받은 후 다음주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알바자리였지만 수개월 동안 거듭되는 탈락과 거절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온 ‘성공’이었다. 이 작은 성공 덕분에 얻은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머금고 알바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 로비를 나서는 순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뭐지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 전화는 몇 군데 이력서를 넣은 대행사 중 한 군데에서 온 전화였고 그렇게도 내가 기다리던, 다음주부터 출근하라는 통보 전화였다.

 그 전화를 끊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통화내용은 당시에 너무 어안이 벙벙했던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오피스 빌딩에서, 구직에 성공하고 회전문을 나서자 마자,  정규직 합격 통보를 받은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푸른 하늘이란… 정말 그렇게나 날씨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5월의 하늘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빌딩 앞의 광장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펄쩍펄쩍 뛸 뻔 했다.

 합격 통보의 흥분이 가라앉자, 사소한 문제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인데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던 알바자리 역시 다음주부터 시작이었던 것. 물론 취직한 마당에 그런게 대수겠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나의 큰 ‘성공’ 때문에 작은 성공을 안겨준 사람에게 죄송한 소리를 해야 했고 더군다나 그 대상은 안면이 있는 대학교 동기였다.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이런 좋은 소식이 겹친 것이 아주 살짝 야속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인생에 잠깐이지만 심각하게 닥쳐왔던 생존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제 비로소 스스로 벌어서 스스로 먹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 겹친 또 하나의 작은 행운이라면, 월급날이 애매하게 걸려서 입사한지 불과 보름여만에 (완전한 1개월 액수는 아니지만)첫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오늘내일 하던 차에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나에게는 굉장히 큰 기쁨으로 다가왔었다.

 지금이야 굶어죽을 걱정 없고, 내가 노력하면 잔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속 편한 처지가 되어 살고 있다. 거기다가 전혀 월세걱정 없는 주거공간도 갖추고 있으니 그때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가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옛날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 나는 참 절박했었지란 생각과 함께 그 (남들이 보기엔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를)위기를 어찌어찌 이겨내며 살았던 그 시절의 나에 대한 대견함을 느낀다. 이젠 평생 그럴 일이 없겠지만, 때때로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작은 좌절에 밀어넣을 때면 항상 그 좌절의 시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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