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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요즘 말도 안되는 이유로 21세기임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재택근무에 온라인 강의라니 그야말로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거기다가 바깥 풍경은 사람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다 우주인을 연상케 하는 ‘레벨D’(그 이름도 가히 미래적이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되니 이 또한 우리가 상상해왔던 펑크적인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요 몇달 사이에 미래세계의 희망편과 절망편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듯 하다.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지만)네트워크로 업무를 보고 학교를 다니는 모습과 전지구적인 역병으로 사람들마다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모습.

이제 마스크 쓰는 게 예전만큼은 거추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 상황에 우리는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된 것 같다. 물론 마스크 쓰는 것과 일명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지칭되는 반격리 상황은 결코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이정도로 사태가 장기화되고 심지어는 아직도 속시원한 솔루션이 등장하지 않아 얼마나 갈 지 속단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이 거추장스러운 상황에 준하는 어떤 ‘새로운 사태’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전문가들의 아티클 중에 ‘뉴 노멀’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는데, 읽으면서는 썩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일이 지나고 지나면서 정말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을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이것보다는 약간 나은 상황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된다면, 정상 상황에서는 도저히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일을 하는 나같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지금이야 초반이니까, 임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서 아쉬운 대로 정상 상태를 대신하는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고착화된다면? 이런 질문은 이제 어떤 처지에 있는 누구라도 할 만한 것이 되었지만 정체성 자체가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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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합대회’의 몰락

좋든 싫든 조직에 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에게 특강이나 ‘단합대회’조의 행사는 스트레스의 온상이 된다. 뭐 물론 그런 행사의 근원이 되는 조직문화를 내면화해버린 많은 ‘높으신 분들’이나 높지도 않은데 내면화만 해버린 정신승리자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팀웍이나 개인의 수준향상 등의 목적으로 강제소집되는 강연이나 행사는 수많은 이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때로는 더욱 고귀한 목적을 위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소환되기도 한다. 그 비근한 예로는 대한민국 20대 남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예비군 훈련’이 있겠다.

이런 집단행사가 스트레스의 온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하다. 강제로 끌려와야 하니까. 조직 내에서 많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분의 판단에 의해, 혹은 ‘그냥 좋겠다’싶은 한 마디 때문에 명줄을 건 많은 이들이 자유시간을 반납한 채 어딘가에 모여 의욕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물론 많은 집단행사는 작당한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간식이나 기념품을 준다든지, 회사의 경우라면 근무시간 인정을 해준다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왜 참여안해’라는 마인드로 열리는 집단행사는 당근도 없이 내 멘탈에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 물론 집단행사를 추진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누가 사람들 괴롭히려고 그런 번거로운 일을 조직하나. 자기 딴에는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자신의 수고를 들여 일을 추진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기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그 일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추진자가 생각하는 대로의 도움은 절대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배움은 다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배워야 할 것, 좋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푸쉬를 하는 거다. 딱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지. ‘주입식 교육’. 학습 내용에 관심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들을 앉혀놓은 다음 앞에서 막 떠든다. 그러면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배우기 전에 동기부여는 전혀 없고,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강제성만 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고, 우리가 말하는 수재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왜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니까’. 그건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이유이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기 위해 학원에 가고, 학교에선 잔다.

사회에서 경험하는 많은 집단행사도 이런 주입식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의 발전이나 조직의 발전. 뭐 그런 것들을 준비해 놓고 그냥 푸쉬를 한다. 정말 우리에게 좋은 거면 어련히 알아서 참석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를 염려해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높은 분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우리는 선택권 없이 그 ‘좋은 기회’에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판단해 참여했다면 충분한 동기를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그 행사를, 끌려왔기 때문에 어떠한 동기부여나 참여의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억지로 하게 된다. 학교에서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조는 것처럼, 행사나 특강에 온 많은 이들도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버린다.

사실 집단행사나 주입식 교육은 모두 우리의 20세기를 지배했던 집단주의의 산물들이다. 충분한 수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계몽하는 것. 숙련되지 못한 대량의 인력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 이것을 위해 우리는 몇몇의 집단으로 분류되었고 그 집단의 단위로 컨트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나친 ‘개인주의’를 우려할 정도로 사람들은 개인화되었고,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의 실현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들의 역량도 향상되었다. 과거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없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학생’ 혹은 ‘직장인’이라는 카테고리로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든 거다. 그런데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여전히 ‘학생’ 혹은 ‘직장인’의 카테고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는 이들에게 획일화된 방법 하나를 강제하니 그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지금 시대의 양성은 ‘방법’이 아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스트레스의 근원인 수많은 집단행사는 바로 그 ‘방법’들 중의 하나다(그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집단행사는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자). 목적은 공감하나 그 시기와 방법에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선택권’이다. 집단행사에 대한 선택권을 주면, 그건 공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그 정도도 동기부여를 못하는 사람은 관둬야지. 하지만 그 정도 동기부여는 된다고 가정하면,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기회를 활용하려 들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그 행사의 효과도 적절하게 발휘될 것이다. 생각보다 스스로 하는 일과 억지로 하는 일의 능률 차이는 크다. 그렇게 적절히 기회를 활용하는 사람은 하고, 아닌 사람은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것도 안하는 사람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야박한 소리이지만 의지가 없는 사람은 딴길 알아봐야지. 이렇게 해야만 양성의 결과가 내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을 통한 세뇌가 아니라 진짜 내면화. 그거 해야 진짜 오래가는 인재가 될 것 아닌가? 언제까지 존버해서 승리한 개살구들만 내놓을 것이냔 말이다.

* 사실 특정한 배경이 있는데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뭔소리야 싶은 알쏭달쏭한 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힌트는 다 있으니 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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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감에 대한 깨달음

서울에 산 지 15년이 되어 간다. 15년이라니 참 징그럽다. 15년 전에도 난 어른이었는데 지금도 그냥 어른이구나. 그때는 15년이 지나면 엄청난 사람(어떤 방향으로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좀 서글프다. 그렇다. 난 나이를 먹은 것이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집중력이 없는 건지, 내 시야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 한번씩 그쪽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문앞 자리는 나에게 쥐약 같은 곳이다. 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가니까. 뭔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참… 집중력이 부족한 인간이다. 아. 할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 20대들인 것 같다. 대학로니까 그럴 수도 있고, 만만한 스타벅스니까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대학로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 이 스무살 언저리들의 존재를 자주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종종 나 자신의 위치가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드는 경우들이 있다.

 1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대학로에 있었다. 이 동네에 살았다는 게 아니라, 여기 왔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커피를 마셨고, 술집을 갔고, 길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때에도 분명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을 거다. 그때 나는 내가 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내가 20대가 많은 대학로에서 20대처럼 놀고 있었던 거다. 뭐 당연한 소리지만.

 시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대학로 20대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커피집에 앉아 있다.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기 대학로에 앉아 있고, 내 주변에 20대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때엔 쟤들도 20대 나도 20대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을 때 뭔가 모를 감정이 느껴진다. 늙어서 서럽다 뭐 그런 것보다는, 시간의 빠름에 대한 놀람 같은 느낌 정도일까. 나는 그대로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대로 있었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물론 그때 그들은 나와 같아졌겠지만), 이제 나는 그들과는 구분되는 ‘아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특별히 젊게 산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정도로 나이 먹었음을 의식하고 살지도 않았다. 15년 전의 나에게 30대 후반이란 까마득한 미래였고, 나와는 큰 관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때의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전날 먹은 술이 예전처럼 빨리 깨지 않아도, 뒷목이 뻐근하고 움직이는 게 귀찮아도, 눈이 침침하고 모니터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도 다 내가 건강관리를 못한 탓이지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열 살 어린 동생들이랑 사니 스스로 늙은이요 아재라고 칭하며 궁상맞은 척을 했지만, 실제로 내가 늙었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로 내 나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짜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예전엔 이 젊고 예쁜(혹은 멋진)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예쁘거나 멋지지 않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같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떠오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근데 아직도 이렇게 애처럼 살고 있다니, 적어도 이쯤 되면 조금 더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덧.서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늙음 한탄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다 창문 바라보는 1인석을 많이 마련해놓지 않은 스타벅스 대명거리점의 탓이다. 괜히 홀 한가운데 앉아서 사람들 보다가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리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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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 포에버

몇년 전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을 때, 무슨 대단한 흑인 영화인양 호들갑을 떠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블랙팬서>는 재미있는 영화였고 부족전쟁 같은 느낌의 스토리나 비주얼 역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흑인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할 만한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이 영화를 개념영화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나에게 블랙팬서란 아프리카 스킨을 쓴 헐리우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로 묶일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아니면 그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혀져 있던 어떤 가치들를 담은 상업 컨텐츠가 많이 나온다. 제일 자주 보이는 건 아무래도 페미니즘 관련 컨텐츠이겠지. 이건 내가 뭐 딱히 코멘트할 것도 없고 코멘트할 자신도 없으니 넘어가지만, 아무튼 요런 것들을 내세우며 개념 컨텐츠인양 하는 것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 그건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하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다.

블랙팬서를 예로 들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와칸다 포에버’ 풍의 스타일이 잔뜩 발라져 있지만 그 기반의 구조 자체는 유럽인이 비유럽인들을 보는 전형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그런 거다. 사실 비브라늄(맞나?)이 넘치는 비밀의 나라 요런 세계관은 딱 ‘엘도라도’의 그 세계관이다. 유럽인들이 남미 와서 황금의 나라 찾던 그 세계관이 바로 블랙팬서의 세계관인 거지. 그리고 그 비밀의 나라가 과학이 엄청 발달해서 유럽인들을 압도할 정도라는 설정 역시 ‘신비의 동양 무술’ 뭐 이런 걸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시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웅들이 힘을 모아 세계의 위기를 막아낸다 이런 서사 역시 전형적인 서구 영화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세계관이 이런데, 고작 흑인 캐스팅이나 아프리카 스타일 소품 따위로 흑인 영화의 새 지평을 연 것인양 하고 있는 건 진짜로 그냥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한 거다.

사실 마블 영화들이 좀 다 이렇고, 한국 영화 중에는 CJ영화나 그 계열 드라마들이 특히 이런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인 것 같다. 인종, 여성, 역사의식 등의 포인트들을 살짝 발라놓고 그게 무슨 대단히 의식있는 컨텐츠인 양 하는 것이지.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 하나가 게이라고 해서 그게 그 영화의 성격을 규정지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화가 정말로 그런 열린 관점에서 이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것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모습들이 ‘이레귤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그런 소수자 이슈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뭐 요즘 보면 딱히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다만) 근데 그걸 극의 흐름과는 별개로 노골적으로 깔아놓은 건 그냥 그게 ‘세일즈 포인트’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갑자기 주인공이 최신 스마트폰을 브랜드가 잘 보이게 들고 기능자랑을 하는 PPL처럼 말이다.

창작자의 예술적 기질보다는 기획자가 배치하는 흥행 포인트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의 컨텐츠 시장에서, ‘개념작’소리를 들으며 잘 팔리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예술적 완성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업 컨텐츠니까 잘 팔려야지. 근데 잘 팔리는 걸 만들기 위해 ‘잘 선정한’ 주제를 송곳처럼 배치해 놓고 그게 무슨 진정성 있는 문제작인양 생색내고 그걸 소비하면서 개념인인양 드러내는 요즘의 현실은 과연 이 자들이 진짜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시대에 진정성을 찾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스킨’만이 문제들의 본질인 양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시대에, 깊이 있는 생각들은 시간낭비 취급을 받으며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은 좋아요 한 번으로, 인스타그램 관람인증 하나로 해결되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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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혹은 가난한 이

나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때문인지 유난히 길거리 헌터(?)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잦다. 아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길거리 헌터의 카테고리는 다 당해본 것 같다. 도를 아십니까는 기본이고, 그리스도교 계열의 가두선교나 각종 사이비 종교의 포교활동, 설문지나 모금(사실 이것들도 상당수는 다 사이비로 이어진다) 등에도 안 걸린 적이 없다. 이쯤 되니 이젠 길거리에서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아 또 왔구나 싶은 촉이 올 정도다.

뭐 길거리에서 누굴 만나든 이제 초연해질 정도가 되었지만, 요근래 갑자기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부류의 길거리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돈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냥 ‘걸인’이라고 해도 되지만 사실 길바닥에 깡통 하나 깔아놓은 전형적인 걸인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교통비 조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걸인’이라는 특정 단어로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걸인에 해당하지만.

아무튼 이 ‘돈을 원하는 사람’이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이유인 즉슨 저번에 나를 꽤 괴롭게 했던 <언행 불일치> 사건 때문이다. 사실 이전엔 이런 사람들은 그냥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번 직장인 시절에 길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이에게 오만 원이란 거금을 준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뭐 그때야 한참 영적으로 맑았던 시절이었고 또 돈도 벌고 있었으니 적선하는 셈 치고 준 거였다. 그걸 페북에 올렸더니 호구로 몰려 한동안 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뭐 그럴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또 괜히 사기꾼들한테 돈 쥐어주기 싫다는 생각도 들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도 쿨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지난 번 그 사건 이후 길거리에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모든 ‘돈을 요구하는 이들’을 도매금으로 사기꾼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중에 최소한 한 명은 정말 돈이 급해서 어렵게 용기를 낸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아니, 설령 그들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내 돈 만원 이 만원이 필요한 ‘가난한 이’라는 점은 맞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지나가다 만나는 모든 ‘청하는 이들’에게 돈을 줄 정도로 내가 여유롭지도 않을 뿐더러, 귀찮음과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 덕분에라도 나는 앞으로도 돈을 선뜻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사기꾼 취급해서, 나쁜 놈들이니까 저들한테 돈을 주는 건 나쁜 일이야 하고 생각하며 합리화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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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 이야기

 지금(2019년 2월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컴퓨터는(태블릿 ‘PC’를 제외한다면) 나온지 7년이 다 되어 가는 2012년 6월 출시 13인치 맥북프로(2012Mid)다. 아마 이게 비레티나 맥북 프로로는 마지막 제품일 거다. 지금 세대 맥북에서는 다 사라진 것들이 많이 달려 있다. DVD-rw(지금은 들어내고 그 자리에 HDD를 달아놓았다), 미니디스플레이 포트(요즘건 없더라고), ir리시버(이제는 애플샵 직원도 그 존재를 모르는 ‘리모콘’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물건) 같은 것들이 여기 다 달려 있다.

 이걸 살 때에는 물론 최신 노트북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였는데, 2012 맥북 라인업이 업데이트되자마자 샀으니 이 제품의 온라인 구매자로는 순위권 안에 들 수도 있다. 그때도 레티나 맥북 프로가 있었지만 더럽게 비쌌고 나에겐 그 정도의 성능이 필요치 않아서 그냥 맥북프로 라인의 저렴이(?)를 골랐었다. 이미 데스크탑은 게임용을 하나 쓰고 있었고, 예전 회사에서 맥북(화이트, 2007년 모델)을 썼었는데 퇴사 때 반납한 후 노트북의 필요성이 생겨서 산 거였으니 굳이 고성능이 필요 없었던 거지.

 아무튼, 사고 나서 잘 쓰다가(사실 이걸로 일은 얼마 안 했다) 신학교를 오게 되었다. 살고 있던 자취방을 정리하고 성당으로 들어가는데 데탑은 집에 보내고 이 맥북만 들고 왔다. 그때 생각으로는 짐도 줄이고 게임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는데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 왜 신학교 오면 게임을 안 할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쨌거나 그때부터 나는 다른 윈도우 컴퓨터 없이 이 맥북만 쓰게 되었다. 윈도우가 없는 환경에서 살면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고 또 학기중엔 학교 컴퓨터실을 쓰면 되니까 아주 치명적인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7년을 맥북 하나로 버텨 왔다. 다만 이제 연식이 꽤 된 컴퓨터이다보니 기본적인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지금 이거 쓰는데도 자판이 밀리니 뭐 말 다 했지.(메모 앱이 많이 무거워진듯)

 이걸 처음 장만할 때에 비하면 맥북 사용자가 정말 많이 늘었다. 그때 맥은 진짜 쓰는 사람만 쓰는 물건 정도였고 그나마 부트캠프로 윈도우 깔아서 쓰는 사람도 꽤나 많아서 osx깔아서 쓰고 있는 사람 보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별다방에는 유난히 맥북이 많았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네이티브로 맥을 쓰는 사람도 많고 어딜 가나 사과가 번쩍이는 노트북 뒷판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게 되었다(요즘 맥은 사과에 불이 안들어오긴 하지만). 뭐 남이 뭘 쓰던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도 (전직)덕후의 마음이란 게 희소성있던 물건이 대중화되면 괜히 샘나고 그런 게 있어서 아쉬운 마음도 조금 들고 한다(왜?).

 점점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 가고 있다. 아무튼 오래 쓰다 보니 애착도 생기고 오래 되었음에도 아직까진 쓸만 해서 7년차 노트북임에도 현역으로 잘 써먹고 있다. 그러고보면 아무리 요새 osx가 문제가 많다고 해도 좋은 운영체제이긴 한 것 같다. 예전 윈도우 쓰던 때라면 7년전 모델을 쓰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텐데… 물론 이걸로 최신게임을 돌리거나 하는 건 아니어서 사양에 크게 예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상편집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이니 잘 만든 os인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당장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그렇게까지 강하게 들지 않는 상황이기도 하다. 뭐 바꾸면 좋겠지만 워낙에 비싼 물건이기도 하고 지금 쓰는 데에 크나큰 지장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노인학대를 하고 있나 보다.

 나이가 들다 보니 점점 빈티지한 것들,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하나 사서 오래 쓰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 스마트폰처럼 좀 안 바꾸면 많이 느려져서 꽤 불편한 것들이 아니면 딱히 새로운 것을 장만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짐이 점점 는다. 어쨌거나 살아가면서 이것저것을 계속 사게 되는데, 예전 것들을 버리지는 않으니까. 이럴 바엔 그냥 아무것도 안 사는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지만 이게 또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안 사면서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들다. 또 워낙 자잘한 소품들을 좋아해 놔서… 그러다보니 옷장엔 입지도 않는 옷이 한가득이고(SPA브랜드 옷들도 다 튼튼해서 십년씩 입어도 멀쩡하다. 낡은 건 또 빈티지라는 명목으로 남겨 놓고) 서랍에도 온갖 쓰잘데기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다. 이런 와중에 7년이나 된 물건이 아직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좀 뿌듯하기도 하고 그렇다. 특히나 노트북 같은 성능에 민감한 기기가 이렇게나 버텨 주니 말이다.

 사실 맥북으로 업무를 보는 건 예전부터 이상하게 잘 되지 않았다. 윈도우 쓸 땐 모니터가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수백 수천 행의 엑셀 데이터들을 편집하곤 했었는데, 이상하게 맥북으로만 하면 자연스레 느긋한 한량모드가 되어 업무를 해야 할 상황인데도 웹서핑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하기 일쑤였다. 10여년 맥북을 쓰면서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원인은 맥의 마우스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맥 마우스 커서에 가속도가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맥 운영체제인 osx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면 커서가 띡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스르륵 하고 움직인다. 말로 하려니 어렵네. 아무튼 그래놔서 코딱지만한 PPT 오브젝트를 미세하게 조정하거나 하는 데엔 썩 적합치 않다. 스크롤도 관성이 적용되어 있고… 그래서 빠릿빠릿하게 일을 안 하게 되나… 가 아니라 그냥 일을 하기 싫었던 게 아닐까.

어쨌거나 일보단 노는 것에 최적화된 내 맥북이지만 그래도 이걸로 레포트도 많이 쓰고 논문도 하나 쓰고 했으니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이걸로 논문 하나만 더 쓰면 된다. 그때까진 현역으로 잘 버텨주길.(그때되면 바꿀 여유가 되겠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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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 불일치

지난 2월 1일부로 ‘말씀의 봉사자’가 되었다. 제단 위에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강론’의 권한이 생김으로 인해서.
덕분에 그래서 주기적으로 남들에게 ‘고상한’ 말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내가 다른 이들, 특히 많은 이들 앞에서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기회는 거의 없었고, 나 역시 그런 기회를 주도적으로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사정이 바뀌었다. 하기 싫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젠 반드시 주기적으로 교훈적인(물론 반드시 교훈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부족한 인간인 내가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참 영광이고 감격스럽고 그렇다. 이게 싫다는 생각은 (아직까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문제는, 내가 그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주제넘게 떠들어댄 그 이야기를 나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더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은 주일학교 강론이 있었다. 그날 복음이 참행복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피안의 행복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좀 벅찬 것 같아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와 우는 이들에게 보여 주시는 관심을 주제로 강론을 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론이 끝나고 미사도 끝나 성당 밖으로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누가 다가왔다. 신부님이냐고 물어보길래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은 부제라는 걸 잘 모르는듯 했지만 수단을 입고 있으니 성직자인가보다 했나보다. 아무튼, 그 사람은 어렵게 나한테 사정 이야기를 하며 만원만 달라고 청했다. 천원도 아니고 만원. 하지만 그때 나한테는 지갑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동행하던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따라 들어가 할 일이 있던 나는 좀 난감해졌다. 난색을 표했더니 급했던지 사무실에라도 가서 좀 빌려줄 수 없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성당 직원분들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사적으로 돈을 빌릴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며 곤란함을 드러내니 그 사람은 뭐라도 해 줬으면 하는 표정으로 계속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먼저 간 사람들을 얼른 쫒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나는 그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 버리고 말았다.
그 자리를 떠나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렸다. 지갑을 가지고 나와 도와드렸어야 하는 게 아닌가. 방이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 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 분 전에 했던 강론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내가 내 입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했는데.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자고 내가 이야기했는데. 불과 몇 분 전에.
괴로웠다. 강론대에 올라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 놓고 정작 나는 가난한 사람을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해 버렸다. 뭐 물론 사기꾼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쨌거나 만 원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만원을 가진 사람이었고. 내가 내 입으로 떠든 대로라면, 나는 그 사람을 그렇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다. 아, 나는 강론대에 올라가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같은 내용으로 하게 될 두 번째 강론을 하기가 두려웠다. 이미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는데. 어린이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거 좀 늦게 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었을 텐데. 들어가서 지갑 좀 가지고 나오는게 그렇게나 귀찮고 어려운 일이었나. 내가 예수님을 모른 척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한 내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론을 새로 쓸 시간은 없었고, 나는 결국 (거짓말이 되어버린) 준비한 강론을 다시 하게 되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그렇게 살기가 참 어렵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사족으로 붙인 채.

좋은 말을 하기는 참 쉽다. 오랜 기간의 학습과 배움으로 우리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답에 가까운 그럴듯한 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말이 참말이 되도록 살기는 쉽지 않다. 나도 안 하는 걸 남보고만 하라는 건 위선일 뿐이다. 강론이란 걸 하게 된 지 불과 3주만에, 나는 내 위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좋은 말’의 가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된 것 뿐이지. 그래서 계속 좋은 말은 할 거다. 어차피 이제 그게 내 직분이 되었으니까. 대신, 그 ‘좋은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할 거다. 나에게 그런 좋은 말을 많은 이들 앞에서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 분을, 또 그런 말을 고맙게도 잘 들어 주시는 많은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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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욕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화가’다. 그림 그리는. 뭐 먹고살기 바빠 어떨 땐 취미로 그림 하는 사람들보다 더 그림을 멀리 하고 사시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본업은 ‘화가’다.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아직 가능태에 불과하던 시절에는 꽤 전도유망한 미술학도셨다고 한다. 풍경을 자주 그리시다 보니 내 취향과는 다소 맞지 않지만(나는 조금 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을 선호한다), 작품을 보면 나 같은 똥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며 화가가 맞긴 맞구나(아버지 죄송합니다ㅠㅠ)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덕에, 나도 예술적인 센스는 조금 있는 것 같다. 사실 이걸 뭐 내 입으로 이러쿵저러쿵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남들보다는 좀 더 예술적 기질이 있긴 한 것 같긴 하다. 아버지가 내가 어랬을 때 그림그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기 때문에(소질이 없다고 일갈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난하게 살거 같아 그러셨던 것 같다) 스킬이 없어서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재주는 없지만, 어쨌거나 머릿속에는 창조적인 생각이 들어있고 여건이 된다면 그게 결과물로 나타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하시던 미술학원이라도 다녔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학원 누나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뭐 그거야 이미 수십년 전에 물 건너간 거니까… 포토샵으로 깨작거리고 있다 보면 나도 드로잉을 좀 할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타고난 피와는 달리 수련을 안해서인지 원래 재능이 없는건지 아무튼 중학교때 만화 그린다고 깝죽대던 시절 이상으로 나아지지 않아 좀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다.
 아, 원래 하려던 이야긴 이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드로잉 스킬은 물려받지 못했지만(잠재능력이 있을지도) 예술적 센스는 물려받은 덕분에 뭔가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면서 산다. 뭐 그게 아트웍일때도 있고, 글일 때도 있고, 가끔은 음악일 때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교 때 포토샵과 영상을 좀 배워서(둘다 독학이어서 고급기능은 모른다) 그 둘은 좀 만지기도 하고 덕분에 그걸로 밥벌이도 좀 했는데 그렇다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지는 못했다. 뭐 남의 거 수정이나 좀 할 줄 알았지… 글은 그래도 인정받은 몇 안되는 분야 중 하나인데, 그것도 큰 상을 타거나 한게 아니라 그냥 소소하게 논술 점수 좀 잘 맞고 교내/영내(군대) 백일장 같은거로 수상 몇 번 하고 그정도여서 내세울만한 게 1도 없다. 브런치도 까이고… 아무튼 그래도 글은 키보드만 두드리면 쓸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수월하게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분야이긴 한데 사실 내가 글을 진짜 잘 쓰는지도 잘 모르겠고 이걸로 밥벌어먹겠냐 하면 그 수준도 아닌것 같고 해서 저는 글쓰기가 재능입니다 하기엔 좀 쑥스럽고 그렇다.
 어쨌거나 아트웍이나 글은 그래도 아~주 못 하는건 아니라서 그냥저냥 하면서 내 ‘예술적 욕구(?)’를 충족하곤 하는데, 음악은 그렇지가 않다. 음악은 어렸을 때부터 젬병이었고 지금도 전혀 못한다.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잠깐 다녔는데 바이엘을 하다가 피아노 학원이 이사를 가버려 끊은 이후로 나는 어떤 악기도 배우거나 다루지 못했다. 아, 고등학교 때 풍물동아리를 했지만 뭐 그거야 활용성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 음악적 재능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도 음표를 못 읽는데 뭐. 물론 음악 못한다고 죽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음악 분야에도 그놈의 ‘예술적 욕구’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할 줄 아는게 쥐뿔도 없는데 왜 음악은 만들어보고 싶은 건지. 세상이 좋아져서 나같은 음악고자도 다룰 수 있는 개러지밴드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도 있고 여기저기에 악기들도 널려 있지만, 다른건 투닥투닥 하다보면 결과물이 나오던데 음악만큼은 도대체 그게 잘 안 된다. 내가 기준이 너무 높나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럴듯하긴 해야지. 근데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도 잘 안되니 이게 참 답답할 노릇이다.
 글쎄, 음악과는 일절 관련 없는 사람이 왜 음악 못 만드는걸로 스트레스를 받나 싶겠지만(사실 스트레스까진 아니고) 나도 좀 잘했으면 좋겠다 싶은 열망이 있고 음악 잘 하는 사람 보면 부럽고 하는게 아무리 봐도 욕심 같은 내 심정이다. 뭐 음악만 그런 건 아니지만 음악은 특별히 좀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든다. 그럼 왜 안 하나? 그러게. 끈기가 없어서인지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무튼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며(코드 몇 개 잡을 줄 아는 걸로 ‘기타를 칠 줄 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렇게 될 것 같다.
 결국 의식의 흐름대로 아스트랄한 글이 되어 버렸지만, 아무튼 창작욕이란 건 괴롭다. 내가 그 창작욕을 충족시켜 주지 못함에도 그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걸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부럽다(나는 이 글을 쓰기 21시간 전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나왔다). 이게 다 재능 없이 센스만 물려준 아버지가 문제… 가 아니고 아무튼 앞으로는 이 창작욕을 좀 풀어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프로의 세계로 넘어 오면서 나는 아마추어 수준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게 되어 버렸고(그걸로 밥벌이는 불가능하고 밥벌이와 무관한 일은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학교에 오면서 거의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해내야 하겠지만 가끔은 내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으면 싶다. 어차피 이젠 그걸로 밥벌이를 하면서 살지는 않을 거니까, 철저히 취미가 되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욕심부려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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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가치

 얼마전 모 유력 정치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밝혀도 되긴 할텐데, 선거기간이라 괜히 쫄아서 ‘모’ 정치인이라고만 쓴다) 꽤 좋아하는 분이긴 하지만 일부 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해서 한시간 조금 넘게 진행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연을 통해 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논리적 설명을 통한 ‘설득’의 경험 말이다.

 (논리적) 설득은 꽤 일상적인 행위이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뭐 사실 우리가 말과 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목적 중의 상당수가 이 ‘설득’을 위한 거니까, 설득은 결코 신선한 경험일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단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에선) 늘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 논리적 설득의 경험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건, 내가 요즘 얼마나 논리적 설득에서 멀어져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설득이 일상적이어야 할 세상에 살면서도, 너무 설득과 무관계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권위에 의존해 윽박지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슨 지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받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얻고 마음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윗사람이 시켜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을 하는데 왜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일 자체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외부적인 데서 동기(motivation)를 찾아야 한다. 그게 대부분은 ‘돈’이다. 사람들이 윗사람 욕, 갑질하는 광고주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납득할만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알맹이 없는 번드르르한 결과물이 나오기가 십상이다.

 우리는 설득 대신 갈굼과 ‘쇼부(しょうぶ, 勝負)’에 익숙하다. 뭐 그것들 역시 나름대로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정도(正道)의 설득과 조금 다른 건, 그것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내용을 통해 듣는 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건 결코 ‘스탠다드’라고 할 수 없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을 때에 한번씩 써먹을 수 있는 변칙 플레이 같은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설득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사바사바 해서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까라면 까 정신에 입각해 시키면 할일이지 무슨 설명이 필요해 같은 마인드로 일을 ‘하달’한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이럴진대,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수긍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사실 이게 다 권위적 사회의 결과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왜 수고스럽게 설명을 해주냐? 이게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니 설득을 당해본 적도 없고 당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도 없다. 세상이 이러니 정치도 수준높은 설득보다는 선동이나 프로파간다 위주가 된다. 유독 정치에 네거티브가 판치는 이유는, 설득을 해본적도 당해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굳이 귀아프게 설명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거 빵 터트려서 주목받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일 게다. 아니면 정말 설득할만한 ‘컨텐츠’가 없거나.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간만에 장시간 정치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참 말 잘하네’ 정도의 감상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스피치를 통해 나는 내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 정치인의 일부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귀가 얇은 건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사회에 살면서 이정도로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고 설득을 당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놀아났다’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내가 놀아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 정치인은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고,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적어도 나는 그 정치인이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를 탈락시킨 이들, 나를 욕하는 이들, 나에게 업무나 과제를 던진 이들 그 누구도 왜 자기가 이 일을 내가 하기를 원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한 설명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 의견의 옳고그름을 떠나 나는 인간적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정치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설득의 가치는, 설득당하는 이가 전인적(全人的)으로 설득하는 이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갈굼과 쇼부가 조직과 비즈니스의 방식이라면, 논리적 설득은 인간의 방식이다. 인간이 인간의 방식으로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을 조직의 일원이나 비즈니스 파트너(혹은 갑과 을)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한다. 배울 만큼 배운 인간들이 왜 배운 걸 써먹지 않고 왜 말초적인 권력관계나 이익관계로만 소통하는 것인가. 설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설득하고, 설득당해야 한다. 그게 말과 글을 쓰는 인간의 방식이다. 생존과 먹이로 소통하는 동물의 방식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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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내 생각과 행동들을 다 ‘관찰’하고 있는 것이 오직 나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꿔, 나는 나를 다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잘 알고 있기는 한 걸까? 너무 당연하게 나는 나를 잘 알지! 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요 몇년간 이어진 생각들을 통해 나는 나를 그렇게 잘 알고 있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 나에 대한 생각들을 꽤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행동과 생각들에 대한 내부적인 피드백(반성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걸 ‘성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 내가 왜그랬지’ 정도의)도 하고 있으며,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며 내 모습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기평가를 하기도 한다.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하며, 어떤 것이 바람직한 모습과 방향일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떄로는 너무 생각이 많아서 문제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양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 스스로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을 것임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목격하면서(생각을 했다면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들은 점점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이렇게 ‘충분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내 모습이 내가 ‘창조해낸’ 더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의 본질 바깥에 있는 껍데기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일종의 ‘레이어’처럼, 내 본모습 위에 무언가를 얹어놓고 그것까지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전까지 내가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또 내보여 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의심이 생겨났다. 나는 과연 솔직한 사람일까. 다른 이에게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인간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지만, 내가 솔직하게 내놓았다고 생각했던 그 모습이 사실은 ‘레이어’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 자신의 솔직함 자체에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 내 표면적인 경험(=과거)을 제외한 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해진다.

 어쩌면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한 많은 것을 그냥 void로 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많은 부분이, 나 자신도 접근할 수 없도록 제한이 걸린 채 나머지 부분만을 보며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예 내가 바라보는 내 모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창조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그것이 본질에 기반하더라도). 그런 생각들을 계속하다보니, 이건 뭐 데카르트도 아니고 자꾸 극단적인 방향으로 의심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정도까지 내가 허상의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 정도는 있다. 뭐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여기까지 오고 만 거지.

 아무튼, 내가 들여다보고 내가 또 내보여주는 나의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제한된 일부분에 불과하고 나는 사실 나를 잘 모른다는 것 자체는 확실한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내가 모른다면, 남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그래서 사람들이 상담도 하고 그러나보다. 하지만 내가 나 스스로를 제한적으로만 드러낸다면, 내가 드러내는 만큼만을 볼 수 있는 남이 나보다 많은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까. 뭐 그런 것이 심리학이고 정신의학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썩 미덥지는 않다. 나도 모르는 걸 남이 어떻게 알아 하는 생각과 함께, 결국 뭔가를 알아낸다고 해도 그건 그냥 추론에 불과한 거잖아 하는 생각이 그런 학문들에 대한 신뢰를 가로막는다. 사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굳이 알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인 요인이든 내부적인 동기부여든 내가 모르는 내 모습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걸 할 수 있도록 해 주는건 나 이외의 어떤 것(사람이든 학문이든)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든다. 물론 내 생각에 그건 단순한 ‘넛지’이상의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알아가야 하는 역할은 나 자신의 몫이겠지.

여담.
사이버스페이스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이런 글을 싸지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가상인격’같은 것도 실현되지 않을까? 데이터형과 AI만으로 구현된, 실체 없이 인간을 ‘에뮬레이트’하는 인격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럼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그 가상의 인격을 실제라고 생각하면서 소통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AI의 발전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지만, 만약 이렇게 인간의 (물리적이 아닌)외형적인 모습들을 가상으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에뮬레이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이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정리하면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생각했던 여러가지 것들이겠지. 그런 점에서 이 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그냥 글을 쓰는 동안 했던 생각의 ‘나머지’에 불과할 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