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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요즘 말도 안되는 이유로 21세기임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재택근무에 온라인 강의라니 그야말로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거기다가 바깥 풍경은 사람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다 우주인을 연상케 하는 ‘레벨D’(그 이름도 가히 미래적이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되니 이 또한 우리가 상상해왔던 펑크적인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요 몇달 사이에 미래세계의 희망편과 절망편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듯 하다.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지만)네트워크로 업무를 보고 학교를 다니는 모습과 전지구적인 역병으로 사람들마다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모습.

이제 마스크 쓰는 게 예전만큼은 거추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 상황에 우리는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된 것 같다. 물론 마스크 쓰는 것과 일명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지칭되는 반격리 상황은 결코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이정도로 사태가 장기화되고 심지어는 아직도 속시원한 솔루션이 등장하지 않아 얼마나 갈 지 속단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이 거추장스러운 상황에 준하는 어떤 ‘새로운 사태’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전문가들의 아티클 중에 ‘뉴 노멀’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는데, 읽으면서는 썩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일이 지나고 지나면서 정말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을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이것보다는 약간 나은 상황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된다면, 정상 상황에서는 도저히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일을 하는 나같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지금이야 초반이니까, 임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서 아쉬운 대로 정상 상태를 대신하는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고착화된다면? 이런 질문은 이제 어떤 처지에 있는 누구라도 할 만한 것이 되었지만 정체성 자체가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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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감에 대한 깨달음

서울에 산 지 15년이 되어 간다. 15년이라니 참 징그럽다. 15년 전에도 난 어른이었는데 지금도 그냥 어른이구나. 그때는 15년이 지나면 엄청난 사람(어떤 방향으로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좀 서글프다. 그렇다. 난 나이를 먹은 것이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집중력이 없는 건지, 내 시야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 한번씩 그쪽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문앞 자리는 나에게 쥐약 같은 곳이다. 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가니까. 뭔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참… 집중력이 부족한 인간이다. 아. 할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 20대들인 것 같다. 대학로니까 그럴 수도 있고, 만만한 스타벅스니까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대학로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 이 스무살 언저리들의 존재를 자주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종종 나 자신의 위치가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드는 경우들이 있다.

 1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대학로에 있었다. 이 동네에 살았다는 게 아니라, 여기 왔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커피를 마셨고, 술집을 갔고, 길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때에도 분명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을 거다. 그때 나는 내가 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내가 20대가 많은 대학로에서 20대처럼 놀고 있었던 거다. 뭐 당연한 소리지만.

 시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대학로 20대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커피집에 앉아 있다.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기 대학로에 앉아 있고, 내 주변에 20대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때엔 쟤들도 20대 나도 20대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을 때 뭔가 모를 감정이 느껴진다. 늙어서 서럽다 뭐 그런 것보다는, 시간의 빠름에 대한 놀람 같은 느낌 정도일까. 나는 그대로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대로 있었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물론 그때 그들은 나와 같아졌겠지만), 이제 나는 그들과는 구분되는 ‘아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특별히 젊게 산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정도로 나이 먹었음을 의식하고 살지도 않았다. 15년 전의 나에게 30대 후반이란 까마득한 미래였고, 나와는 큰 관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때의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전날 먹은 술이 예전처럼 빨리 깨지 않아도, 뒷목이 뻐근하고 움직이는 게 귀찮아도, 눈이 침침하고 모니터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도 다 내가 건강관리를 못한 탓이지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열 살 어린 동생들이랑 사니 스스로 늙은이요 아재라고 칭하며 궁상맞은 척을 했지만, 실제로 내가 늙었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로 내 나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짜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예전엔 이 젊고 예쁜(혹은 멋진)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예쁘거나 멋지지 않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같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떠오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근데 아직도 이렇게 애처럼 살고 있다니, 적어도 이쯤 되면 조금 더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덧.서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늙음 한탄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다 창문 바라보는 1인석을 많이 마련해놓지 않은 스타벅스 대명거리점의 탓이다. 괜히 홀 한가운데 앉아서 사람들 보다가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리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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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 포에버

몇년 전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을 때, 무슨 대단한 흑인 영화인양 호들갑을 떠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블랙팬서>는 재미있는 영화였고 부족전쟁 같은 느낌의 스토리나 비주얼 역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흑인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할 만한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이 영화를 개념영화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나에게 블랙팬서란 아프리카 스킨을 쓴 헐리우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로 묶일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아니면 그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혀져 있던 어떤 가치들를 담은 상업 컨텐츠가 많이 나온다. 제일 자주 보이는 건 아무래도 페미니즘 관련 컨텐츠이겠지. 이건 내가 뭐 딱히 코멘트할 것도 없고 코멘트할 자신도 없으니 넘어가지만, 아무튼 요런 것들을 내세우며 개념 컨텐츠인양 하는 것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 그건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하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다.

블랙팬서를 예로 들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와칸다 포에버’ 풍의 스타일이 잔뜩 발라져 있지만 그 기반의 구조 자체는 유럽인이 비유럽인들을 보는 전형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그런 거다. 사실 비브라늄(맞나?)이 넘치는 비밀의 나라 요런 세계관은 딱 ‘엘도라도’의 그 세계관이다. 유럽인들이 남미 와서 황금의 나라 찾던 그 세계관이 바로 블랙팬서의 세계관인 거지. 그리고 그 비밀의 나라가 과학이 엄청 발달해서 유럽인들을 압도할 정도라는 설정 역시 ‘신비의 동양 무술’ 뭐 이런 걸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시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웅들이 힘을 모아 세계의 위기를 막아낸다 이런 서사 역시 전형적인 서구 영화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세계관이 이런데, 고작 흑인 캐스팅이나 아프리카 스타일 소품 따위로 흑인 영화의 새 지평을 연 것인양 하고 있는 건 진짜로 그냥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한 거다.

사실 마블 영화들이 좀 다 이렇고, 한국 영화 중에는 CJ영화나 그 계열 드라마들이 특히 이런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인 것 같다. 인종, 여성, 역사의식 등의 포인트들을 살짝 발라놓고 그게 무슨 대단히 의식있는 컨텐츠인 양 하는 것이지.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 하나가 게이라고 해서 그게 그 영화의 성격을 규정지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화가 정말로 그런 열린 관점에서 이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것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모습들이 ‘이레귤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그런 소수자 이슈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뭐 요즘 보면 딱히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다만) 근데 그걸 극의 흐름과는 별개로 노골적으로 깔아놓은 건 그냥 그게 ‘세일즈 포인트’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갑자기 주인공이 최신 스마트폰을 브랜드가 잘 보이게 들고 기능자랑을 하는 PPL처럼 말이다.

창작자의 예술적 기질보다는 기획자가 배치하는 흥행 포인트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의 컨텐츠 시장에서, ‘개념작’소리를 들으며 잘 팔리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예술적 완성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업 컨텐츠니까 잘 팔려야지. 근데 잘 팔리는 걸 만들기 위해 ‘잘 선정한’ 주제를 송곳처럼 배치해 놓고 그게 무슨 진정성 있는 문제작인양 생색내고 그걸 소비하면서 개념인인양 드러내는 요즘의 현실은 과연 이 자들이 진짜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시대에 진정성을 찾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스킨’만이 문제들의 본질인 양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시대에, 깊이 있는 생각들은 시간낭비 취급을 받으며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은 좋아요 한 번으로, 인스타그램 관람인증 하나로 해결되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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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혹은 가난한 이

나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때문인지 유난히 길거리 헌터(?)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잦다. 아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길거리 헌터의 카테고리는 다 당해본 것 같다. 도를 아십니까는 기본이고, 그리스도교 계열의 가두선교나 각종 사이비 종교의 포교활동, 설문지나 모금(사실 이것들도 상당수는 다 사이비로 이어진다) 등에도 안 걸린 적이 없다. 이쯤 되니 이젠 길거리에서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아 또 왔구나 싶은 촉이 올 정도다.

뭐 길거리에서 누굴 만나든 이제 초연해질 정도가 되었지만, 요근래 갑자기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부류의 길거리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돈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냥 ‘걸인’이라고 해도 되지만 사실 길바닥에 깡통 하나 깔아놓은 전형적인 걸인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교통비 조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걸인’이라는 특정 단어로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걸인에 해당하지만.

아무튼 이 ‘돈을 원하는 사람’이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이유인 즉슨 저번에 나를 꽤 괴롭게 했던 <언행 불일치> 사건 때문이다. 사실 이전엔 이런 사람들은 그냥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번 직장인 시절에 길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이에게 오만 원이란 거금을 준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뭐 그때야 한참 영적으로 맑았던 시절이었고 또 돈도 벌고 있었으니 적선하는 셈 치고 준 거였다. 그걸 페북에 올렸더니 호구로 몰려 한동안 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뭐 그럴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또 괜히 사기꾼들한테 돈 쥐어주기 싫다는 생각도 들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도 쿨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지난 번 그 사건 이후 길거리에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모든 ‘돈을 요구하는 이들’을 도매금으로 사기꾼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중에 최소한 한 명은 정말 돈이 급해서 어렵게 용기를 낸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아니, 설령 그들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내 돈 만원 이 만원이 필요한 ‘가난한 이’라는 점은 맞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지나가다 만나는 모든 ‘청하는 이들’에게 돈을 줄 정도로 내가 여유롭지도 않을 뿐더러, 귀찮음과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 덕분에라도 나는 앞으로도 돈을 선뜻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사기꾼 취급해서, 나쁜 놈들이니까 저들한테 돈을 주는 건 나쁜 일이야 하고 생각하며 합리화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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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가치

 얼마전 모 유력 정치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밝혀도 되긴 할텐데, 선거기간이라 괜히 쫄아서 ‘모’ 정치인이라고만 쓴다) 꽤 좋아하는 분이긴 하지만 일부 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궁금해서 한시간 조금 넘게 진행된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강연을 통해 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논리적 설명을 통한 ‘설득’의 경험 말이다.

 (논리적) 설득은 꽤 일상적인 행위이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뭐 사실 우리가 말과 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목적 중의 상당수가 이 ‘설득’을 위한 거니까, 설득은 결코 신선한 경험일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단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에선) 늘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당하면서 살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그 논리적 설득의 경험이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건, 내가 요즘 얼마나 논리적 설득에서 멀어져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설득이 일상적이어야 할 세상에 살면서도, 너무 설득과 무관계하게 살아간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권위에 의존해 윽박지르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슨 지시를 받을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받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얻고 마음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윗사람이 시켜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을 하는데 왜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른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일 자체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외부적인 데서 동기(motivation)를 찾아야 한다. 그게 대부분은 ‘돈’이다. 사람들이 윗사람 욕, 갑질하는 광고주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이 납득할만한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면 알맹이 없는 번드르르한 결과물이 나오기가 십상이다.

 우리는 설득 대신 갈굼과 ‘쇼부(しょうぶ, 勝負)’에 익숙하다. 뭐 그것들 역시 나름대로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정도(正道)의 설득과 조금 다른 건, 그것들은 본질에서 벗어난 내용을 통해 듣는 이를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다. 너무 순진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건 결코 ‘스탠다드’라고 할 수 없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을 때에 한번씩 써먹을 수 있는 변칙 플레이 같은 것이지. 하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켜 설득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 사바사바 해서 일을 시키거나, 아니면 까라면 까 정신에 입각해 시키면 할일이지 무슨 설명이 필요해 같은 마인드로 일을 ‘하달’한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 이럴진대,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수긍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사실 이게 다 권위적 사회의 결과물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왜 수고스럽게 설명을 해주냐? 이게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니 설득을 당해본 적도 없고 당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도 없다. 세상이 이러니 정치도 수준높은 설득보다는 선동이나 프로파간다 위주가 된다. 유독 정치에 네거티브가 판치는 이유는, 설득을 해본적도 당해본적도 없는 이들에게 굳이 귀아프게 설명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자극적인 거 빵 터트려서 주목받는 게 효과적이기 때문일 게다. 아니면 정말 설득할만한 ‘컨텐츠’가 없거나.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간만에 장시간 정치인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참 말 잘하네’ 정도의 감상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스피치를 통해 나는 내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 정치인의 일부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귀가 얇은 건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이 사회에 살면서 이정도로 논리적인 이야기를 듣고 설득을 당하는 기회가 흔치는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나에게 ‘놀아났다’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내가 놀아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그 정치인은 자신의 의견을 설명했고,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혔다. 적어도 나는 그 정치인이 왜 그런 의견을 내놓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를 탈락시킨 이들, 나를 욕하는 이들, 나에게 업무나 과제를 던진 이들 그 누구도 왜 자기가 이 일을 내가 하기를 원하는지 충분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구구절절한 설명은 참으로 오랜만에 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 의견의 옳고그름을 떠나 나는 인간적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정치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설득의 가치는, 설득당하는 이가 전인적(全人的)으로 설득하는 이의 의견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갈굼과 쇼부가 조직과 비즈니스의 방식이라면, 논리적 설득은 인간의 방식이다. 인간이 인간의 방식으로 소통함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을 조직의 일원이나 비즈니스 파트너(혹은 갑과 을)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자각한다. 배울 만큼 배운 인간들이 왜 배운 걸 써먹지 않고 왜 말초적인 권력관계나 이익관계로만 소통하는 것인가. 설득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을 이해시키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설득하고, 설득당해야 한다. 그게 말과 글을 쓰는 인간의 방식이다. 생존과 먹이로 소통하는 동물의 방식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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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적 착취와 미투

 요즘의 화두는 역시나 미투다.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가해사례를 보며 새삼 그 심각함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쫄보로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기도 한다. 나도 충분히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는(예전에는 남성 전체를 이렇게 매도하는 것 자체에 크게 거부감이 들었었는데 이젠 뭐 아니라고도 못할 상황이 되어버리고 있다. 워낙 멀끔한 사람들이 가해자로 많이 등장해서) 작금의 상황 속에서 도대체 저들은 간도 크게 어떻게 저런 짓을 저질렀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걸 보면, 나는 역시 그런 짓을 저지르기에도 부족한 위인인 것 같다. 뭐 쓸데없이 간만 커서 해악을 끼치는 것보다 쫄보로 사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성폭력 자체의 측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 않고(어떤 측면으로든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고,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 무슨 이해의 여지가 있는가) 미투 사례 안에서 보여지는 계급적 측면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지금 터진 사례들이 대부분 권력자에 의한 것이지 않은가. 피해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있는 인물들에 의해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 남성에 의한 폭력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권력자에 의한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피해자가 여성이라서 성폭력으로 이어진 것이지 ‘아랫사람’전체의 입장에서 봤을 땐 어떤 방식으로든 그 권력자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양반들이 아랫사람들을 존중해주다가 갑자기 여자들한테만 돌변해서 강압적인 관계를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뭐 만약 그렇다면 그것 또한 문제이겠지만, 아무튼 내 생각엔 아랫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의 문제가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성폭력’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이 희석되는 것 같아 다소 조심스럽지만, 작금의 상황은 분명히 상하관계의 폐해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남녀 간의 사회적 위치도 그 문제적 상하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크게 보았을 땐 사회 전체적인 상하관계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 이번 미투 사태들인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착취하고 있는 사회, 애당초 그 윗사람 아랫사람이란 것도 누가 결정해주었는지 모호한 그 관계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강압하고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다. 지금 미투를 통해 드러나는 추악한 광경들은 그 상하관계에서 발생하는 착취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들이다. 사실 이 정도로 성적 착취 문제가 커진 것에는 우리가 얼마나 성을 가벼운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저지르는 착취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외국에 살아보지 않아서 우리나라가 유난히 다른 나라보다 심한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그 상하관계에 기반한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큰 해악덩어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꼰대’에 의해 고통받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을’들이 ‘갑’에 의해 절망하고 있는가. 출생년도, 입학 혹은 입대년도, 경력, 계약서상 관계 등 수많은 요소들에 의해 우리는 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위아래를 구분짓고 그 관계 사이에 작용하는 파워를 정당화한다. 물론 구조적으로 그런 관계 안에서 일정한 힘의 작용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필수불가결한 수준을 넘어서는, 힘의 남용이 너무도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라고 준 힘이, 권한이 아닐텐데도 많은 윗사람들은 그것을 사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용한다.

 개인적인 바람은, 이번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이 ‘윗사람에 의한 아랫사람의 착취’ 자체가 조명받았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바람은 내가 성폭력의 직접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많지 않아 갖는 나이브한 생각일 수도 있다. 언제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는 당장 직면한 위협부터 해결되어야겠지(성적 위협이 ‘일상적’이란 것을 재확인할 때마다 놀란다. 일부 여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란 게).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조직내 지위에 기반한 부당한 압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우리 사회 조직 전체에 있다. 이 점은 미투를 통해 문제의식을 느끼는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강물처럼 흐르는, ‘선배나 윗사람이 시키면 무조건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없어져야 한다. 윗사람에게는 업무지시만 받으면 되었지 커피를 타다 줄 이유는 전혀 없다. 회사에서 일만 하면 되었지 부장님이 주도하는 회식에 무조건 참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윗사람의 추근덕거림과 그 이상의 행위에 대해 눈을 질끈 감고 견뎌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전혀 없다. 하지만 커피를 타 주지 않으면, 회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더러운 손길에 가만히 있지 않으면 피해는 부당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 아니라 당한 사람에게 온다. 법이 피해자를 충분히 보호해주지도 않고, 설령 법의 보호를 받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당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애써 ‘이걸 드러내서 받을 피해보다 작은 피해’로 합리화하면서 감내해야만 한다. 그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는,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사회 안에서 살아남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건 누가 봐도 문제적인 상황인데, 그게 문제라는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뭐 사회생활 하다보면 윗사람이 좀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다. 뭘 당해도 아랫사람이 문제가 된다. 부디, 이번 운동이 이 상하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로까지 이어져 복종관계가 아닌 파트너십에 가까운 상호적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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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노오오력이 아닌)노력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올림픽을 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데, 사실 올림픽이란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이번이 뭐 특별히 남다른 의미가 있을 만한 것도 아닌데도(한국에서 하긴 하지만 나는 티비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하는 거랑 별 차이가 없다) 굳이 거기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진짜로 나이가 들고 꼰대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뭐 특별히 꼰대스러운 생각들은 아니지만, 올림픽을 보고 그곳에서 뛰고 있는 여러 선수들을  보고 있으니 ‘노력’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뭐 말할 것도 없이, 화면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티비에 나올 만한(사실 그것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노력을 한 이들임에는 틀림없다. 금메달 스토리에 빠지지 않는 에피소드인 ‘관두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따위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남다른 노력으로 중계화면에 잡혔고 올림픽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일부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다.

 노력의 결정체들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뭐 나름대로는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그 인생을 건 노력과 일관성 앞에서 나는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노력과 나의 노력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매일같이 노력의 결정체들을 스크린 너머로 지켜보면서, 인생을 열심히 살기 위해 필요한 노력들을 ‘노오오력’ 따위의 말장난으로 지나치게 과소평가해버리고 마는 내 모습을 뒤돌아보며 성찰하게 된다. 그래, 나는 이 길을 걸으며 언제 죽도록 노력해봤으며,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번이 아닐 정도로 처절하게 싸워 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인생을 너무 느슨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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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작가의 악필

난 악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글씨체가 구려지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도 컴퓨터만 써 대서 글씨쓰기 능력이 쇠퇴하는 걸까. 가끔은 이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아먹지 싶을 정도로 내 기준엔 개발새발 써서 주는데도 글씨 잘쓴다는 소리를 듣거나 적어도 악필 소리는 안 들으니, 도대체 얼마나 못 싸야 악필이라고 욕을 먹는건가 싶을 때가 있다. 악필인 사람들이 주변에 있긴 있으나, 좀 안 예쁠 뿐이지 알아먹는덴 지장 없을 정도던데. 아닌가?

 갑자기 악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연필쓰기를 하면서 글씨체가 변해가는 걸 보고 있는 중에 연필로 원고쓰는 소설가 이야기를 들은 생각이 나서이다.(의식의 흐름이…) 김훈이었나. 아무튼 요즘같은 시대에 아직도 원고지에 원고를 쓰다니 작가의 로망인가 싶기도 하고 장인정신 같은것도 느껴지도 하긴 하지만 그걸 받아보는 편집자들은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도 떠오르고 막 그렇다.(역시 의식의 흐름이…) 뭐 대(大)작가의 친필 원고를 받아서 영광입니다 하는 생각일까 아니면 이거 또 언제 보고 언제 치지 하는 직장인 마인드일까. 뚝 잘라서 한쪽은 아니겠지. 그래도 마냥 영광스럽게 그 원고를 타이핑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본다. 일은 일이니까.

 근데 진짜 그렇게 옮기는 글이 악필이면 얼마나 힘들까. 타이핑하는데 ‘해독’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얼마나 골치아플까. 옮겨야 하는 글이 어중이떠중이의 글도 아니고 무려 대작가의 글인데 악필 때문에 잘못 읽어서 오타라도 나면(사실 이건 오타가 아니라 오독이라고 봐야겠지만) 이건 또 무슨 부담인가. 뭐 악필까지는 아니더라도, 원고지로는 수백 수천장 써나가는 게 소설이니 글씨가 마냥 정자체는 아닐거고 그러다 보면 날라가서 아리까리한 글씨도 생길 만 한데 그런건 또 어떻게 하나. 괜히 지레짐작으로 때려맞췄다가,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써넣은 표현을 밍숭맹숭한 걸로 바꿔넣어 버리면 어떡하나. 뭐 이런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것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금세 연필이 닳아 또 날아가는 글씨가 되어 버렸다(이 글은 연필로 공책에 쓴 걸 옮긴 글입니다). 근데 진짜로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친필 원고는 편집자가 일일이 다 타이핑하는 걸까, 아니면 일단 손으로 쓴 다음에 작가가 직접 파일로 만들어 주는 걸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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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얼이 아닌 눈치가 능력이 되는 사회

 출처를 까먹었는데, 예전에 페이스북인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맞벌이 부부인데, 아내가 직장의 조직문화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 근데 그게 남편 입장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아내가 남편을 부러워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남자들은 그런걸 이미 군대에서 배워 오니 좋겠다’는 거다. 군대문화에서 이어지는 조직문화에 익숙치 않은 여자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내용의 디테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이마를 탁 쳤다. 그 글 속의 대화에 우리나라 조직문화의 불합리가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초등학교때부터 지금 다니는 학교까지 몇 군데의 조직을 경험해본 결과, 우리나라 조직에는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 따르면 무리 없이 조직생활이 가능한, 1인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우리나라 조직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뭐 전세계의 어떤 조직이 입만 벌리고 앉아 있는데 알아서 다 챙겨주긴 하겠냐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우리나라의 조직은 심각한 수준이다.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말하자면 조직 안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의 상당수를 ‘눈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에 출근하는데,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신입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 것일까. 경험치가 있는 사람들이야 으레 9시가 출근시간이려니 하겠지만, 신입이라면 그런 걸 몰라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9시에 오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출근시간은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문제인 경우다. 우리나라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칼같이 정시출근하는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분명히 9시 출근인데 8시 59분에 들어오면 아마 좋은 소리 들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그건 메뉴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8시까지 안오면 눈치보이고, 괜히 일찍 가야 할 것 같고 하는게 다 그 눈치에 의해 시스템이 굴러가기 때문인 거다.
규칙을 칼같이 지키면 얍삽한 사람이 되고, 눈치껏 더 해야 하는 조직. 그런 조직은 진입장벽이 높다. ‘아무도 안 가르쳐준’ 일들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대는 매우 훌륭한 눈치 양성 기관이다. 강도 높은 갈굼을 토대로, 군대는 어리버리한 한 인간을 ‘유도리 있는’ 예비역으로 길러낸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당연히 차별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그런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얻어 터지거나 쌍욕을 먹으면서 배워 왔던 그런 ‘유도리’가 ‘능력’으로 대접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어디에서 써있지 않은 그런 눈치와 유도리에 의한 것들, 그런걸 갖추지 못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일하기 어려운 상대, 부려먹기 까다로운 상대가 되고 강력한 반발을 받기 마련이다. 그럼 그런 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는 여성들 스스로도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들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거 하나 알아서 하지 못하냐고 갈굼을 당하기 때문에.

메뉴얼이 아닌 눈치와 유도리에 의존하는 사회 구조 덕분에 우리는 법에서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고, 훨씬 적은 임금을 받는다. 우리는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회식에 참석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윗사람의 커피를 가져다 드릴 의무를 갖고 있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무능력자, 사회생활 못하는 이가 된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매뉴얼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매뉴얼에 없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부적응자 취급을 받고 손가락질받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라면, 그건 좀 문제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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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빡침의 역사

독립하고 돈을 번 이후 내기 시작한 여러 세금과 공과금 중,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이 바로 건강보험이다. 다른 것들은 그다지 부담이 크지 않거나(주민세 등), 낼만한 돈을 내는 것이거나(통신비), 그도 아니면 사실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잘 모르는 경우(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 나가던 것들)가 대부분인데, 유독 건강보험만큼은 주기적으로 사고(?)를 치면서 내 혈압을 오르게 만든다.

사실 건강보험이 처음부터 문제가 된 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직장인 건강보험 가입자가 되면서 내 명의로 된 보험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야 뭐 돈도 벌던 상황이었고 그나마 월급에서 미리 떼었기 때문에 열을 받고 자시고 할 일이 없었다. 명세서에 찍히긴 했었을텐데 얼마였는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이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회사를 때려치고 지역가입자로 편입된 이후부터였다. 퇴사와 함께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로 전환이 되었는데, 그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던 건강보험료를 직접 내게 되면서 좀 열을 받기 시작했다. 일년에 병원 한두번 갈까말까 한데 몇만원씩 내는게 굉장히 아까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땐 아직 벌어놓은 돈이 꽤 있을 때였고 덕분에 재분배 효과 같은 것도 생각할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좀 배가 아프긴 했지만 고분고분 냈었다. 뭐 또 얼마 안 있어서 4대보험 혜택을 다시 받게 되기도 했고.

본격적인 문제는 내가 일을 완전히 관두고 학교를 다시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에 발생한 문제는 그래도 일하는 도중 쉬면서 발생하는 문제였는데, 이제는 아예 몇년간 돈을 벌 가망이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당장 벌어 놓은 돈이 꽤 있긴 했지만 이제는 잔고가 채워질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건강보험을 고분고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첫 학기를 지내고 하반기가 되면서 보험료가 조정되었는데 이게 무주택 무소득자의 액수가 아니었다. 산정기준을 봤더니 근로소득이 잡혀 있더라. 이게 뭔일인가 해서 알아봤더니 근로소득은 이전 원천징수를 기준으로 산정된다고 한다. 작년도 아니고 무려 재작년 소득을! 그땐 한참 일할때라 원천징수 소득이 꽤 있었는데, 이게 땡전 한푼 못 버는 지금에서야 반영되어 보험료를 올리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뭔 밥통같은 시스템이냐! 결국 내가 스스로 재조정을 신청해야 했는데, 내가 2년전 그 직장에서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증명을 해야 했다. 덕분에 난 2년전 퇴직한 곳에 가서 ‘해촉증명서’를 떼어 와야 했다. 일단 보험료를 높게 질러 놓고 그게 아니면 직접 조정하라는 이 말도 안되는 건강보험 체계에 분노했지만, 아쉬운 건 내쪽이었기에 일단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보험료 조정을 받았다.
‘해촉증명서’를 통한 보험료 조정은 2년을 해야 했다. 언급했듯이 재작년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보험료 시스템상, 일을 한 2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재직상태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2년차의 업무처리는 조금 더 번거롭긴 했지만(돈 받은데가 더 많았다) 뭐 한번 해본 거니까. 귀찮긴 했지만 한번 해본거라 수월하게 했다. 그리고 난 이제 진짜 끝인줄 알았다. 더이상은 보험료 조정으로 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3학년이 되었고, 이제 진짜 돈을 번지 2년이 지나서 완전한 서류상 무소득자가 되었다. 그래서 보험료 조정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메일을 확인하다가 보험료가 무려 3만원돈이 나온 걸 확인했다. 이건 또 뭔 날벼락이냐. 보험료 산정내역을 확인해 봤더니 난데없이 내가 몇천만원짜리 전세집에 살고 있는 걸로 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공짜로 얹혀산지 3년이 되었는데 전세집이라니!! 당장 공단 민원실에 찾아갔다. 담당자는 확인을 해 보더니 그게 내역이 없어서 자동으로 주거비가 책정된 거라는 대답을 해 줬다. 이런 개뼉다구 같은 경우가 어딨냐! 화가 치밀었지만 다행히 담당자분이 굉장히 친절했다. 이게 전산상으로 되는거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무상거주확인서’라는 서류를 작성해 주셨다. 내가 공짜로 얹혀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라는 것이지. 이걸 왜 내가 증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친절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드디어! 보험료가 최저액수로 조정되었다.

무상거주확인서를 받은 후 2년간은 매우 평온하게 지나갔다. 이젠 진짜 소득도 없었고, 무상거주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 담당자분이 이 확인서가 2년간 유효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지만 그건 뭐 까맣게 잊은 채 평화로이 2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올 9월에 메일을 확인하다가 충격적인 보험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까먹었던 새에 내 보험료가 역대 최고액을 경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 확인서의 유효기간이 2년이라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이미 학기가 시작되어 업무를 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외출을 신청해서 일을 보러 갔다. 처음 확인서를 받을 때 워낙 수월하게 일이 처리되어 부담없이 민원실에 방문했다. 근데… 나는 그때 그 친절했던 담당자분이 ‘직권’으로 일을 처리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상거주 확인을 위해서는 거주지의 등기부등본이나 사업자등록증 사본을 제출하란다. 내가 어디서 명동성당 등기부등본을 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저번엔 그냥 해주셨는데요…’라고 했다가 ‘그건 그 사람이 해준 거고요’라는 차가운 대답을 들어야 했다.
 설명을 듣긴 들었는데, 놀라운 건 그 무상거주 확인을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단 등기부등본이긴 한데, 등본을 뗄 수 없는 경우에는 해당 기관 책임자의 신분증 사본이나 뭐 그런걸로도 한다는 거였다(개신교 교회가 그렇게 많이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책임자가 나와 있는 등본은 안되냐고 했더니 그건 또 안된단다. 기준이 뭐야 도대체! 아무튼 안된다니까 일단 돌아왔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답이 안나온다. 뭘 누구한테 이야기해서 어떻게 받아야 하나…

아무튼 이놈의 건강보험, 특히 지역가입자 보험은 도대체 뭘 이렇게 만들어놓은건지 모르겠다. 일단 월세가 월세액*100으로 재산에 산정되는 것부터 열받는다. 이게 부동산 중개료 산정하는 공식인 것 같은데, 어떻게 매달 지출하는 월세가 내 재산액수가 될 수 있다는 거냐! 내가 500에 25만원짜리 월세를 살면, 이 25만원이 2500만원짜리 ‘재산’으로 계산되어 나는 졸지에 전세 3000짜리 ‘재산’을 가진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계산방법이 어딨냐.
그것보다 열받는 건, 이 재산 산정과정이 ‘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월세나 전세 거주자가 아니라서 전산에 뜨는 게 없으면, 건강보험은 내가 이정도 전세집에 산다고 ‘예측’하여 보험료를 산정한다. 아니 데이터가 없으면 재산이 없다고 간주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일단 때려놓고 억울하면 증명하라는 식으로 짜여진 체계는 진짜 말도 안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보험료를 조정하기 위해 이번 년도에도 발품을 팔아야 했고, 더 팔아야 할 것 같다. 절대 보험료를 내기 싫은 게 아니다. 낼건 내고 살아야지. 다만 좀 더 내 상황에 맞는, 납득할만한 액수의 보험료를 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