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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얼이 아닌 눈치가 능력이 되는 사회

 출처를 까먹었는데, 예전에 페이스북인가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맞벌이 부부인데, 아내가 직장의 조직문화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 근데 그게 남편 입장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아내가 남편을 부러워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남자들은 그런걸 이미 군대에서 배워 오니 좋겠다’는 거다. 군대문화에서 이어지는 조직문화에 익숙치 않은 여자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말이다.
사실 내용의 디테일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이마를 탁 쳤다. 그 글 속의 대화에 우리나라 조직문화의 불합리가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초등학교때부터 지금 다니는 학교까지 몇 군데의 조직을 경험해본 결과, 우리나라 조직에는 ‘매뉴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만 따르면 무리 없이 조직생활이 가능한, 1인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우리나라 조직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뭐 전세계의 어떤 조직이 입만 벌리고 앉아 있는데 알아서 다 챙겨주긴 하겠냐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우리나라의 조직은 심각한 수준이다.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건, 말하자면 조직 안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일의 상당수를 ‘눈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회사에 출근하는데,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신입사원은 도대체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 것일까. 경험치가 있는 사람들이야 으레 9시가 출근시간이려니 하겠지만, 신입이라면 그런 걸 몰라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아무도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9시에 오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출근시간은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문제인 경우다. 우리나라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칼같이 정시출근하는데가 과연 얼마나 될까. 분명히 9시 출근인데 8시 59분에 들어오면 아마 좋은 소리 들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그건 메뉴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8시까지 안오면 눈치보이고, 괜히 일찍 가야 할 것 같고 하는게 다 그 눈치에 의해 시스템이 굴러가기 때문인 거다.
규칙을 칼같이 지키면 얍삽한 사람이 되고, 눈치껏 더 해야 하는 조직. 그런 조직은 진입장벽이 높다. ‘아무도 안 가르쳐준’ 일들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대는 매우 훌륭한 눈치 양성 기관이다. 강도 높은 갈굼을 토대로, 군대는 어리버리한 한 인간을 ‘유도리 있는’ 예비역으로 길러낸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당연히 차별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그런 차별은 차별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얻어 터지거나 쌍욕을 먹으면서 배워 왔던 그런 ‘유도리’가 ‘능력’으로 대접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어디에서 써있지 않은 그런 눈치와 유도리에 의한 것들, 그런걸 갖추지 못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일하기 어려운 상대, 부려먹기 까다로운 상대가 되고 강력한 반발을 받기 마련이다. 그럼 그런 조직에 들어가 일을 하는 여성들 스스로도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들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거 하나 알아서 하지 못하냐고 갈굼을 당하기 때문에.

메뉴얼이 아닌 눈치와 유도리에 의존하는 사회 구조 덕분에 우리는 법에서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고, 훨씬 적은 임금을 받는다. 우리는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회식에 참석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윗사람의 커피를 가져다 드릴 의무를 갖고 있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그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무능력자, 사회생활 못하는 이가 된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매뉴얼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매뉴얼에 없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부적응자 취급을 받고 손가락질받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라면, 그건 좀 문제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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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빡침의 역사

독립하고 돈을 번 이후 내기 시작한 여러 세금과 공과금 중,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이 바로 건강보험이다. 다른 것들은 그다지 부담이 크지 않거나(주민세 등), 낼만한 돈을 내는 것이거나(통신비), 그도 아니면 사실 나가는지 안 나가는지 잘 모르는 경우(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 나가던 것들)가 대부분인데, 유독 건강보험만큼은 주기적으로 사고(?)를 치면서 내 혈압을 오르게 만든다.

사실 건강보험이 처음부터 문제가 된 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직장인 건강보험 가입자가 되면서 내 명의로 된 보험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때야 뭐 돈도 벌던 상황이었고 그나마 월급에서 미리 떼었기 때문에 열을 받고 자시고 할 일이 없었다. 명세서에 찍히긴 했었을텐데 얼마였는지 별로 관심도 없었다.
이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회사를 때려치고 지역가입자로 편입된 이후부터였다. 퇴사와 함께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로 전환이 되었는데, 그전까지 신경도 쓰지 않던 건강보험료를 직접 내게 되면서 좀 열을 받기 시작했다. 일년에 병원 한두번 갈까말까 한데 몇만원씩 내는게 굉장히 아까웠던 것이다. 그래도 그땐 아직 벌어놓은 돈이 꽤 있을 때였고 덕분에 재분배 효과 같은 것도 생각할 여유도 있었기 때문에 좀 배가 아프긴 했지만 고분고분 냈었다. 뭐 또 얼마 안 있어서 4대보험 혜택을 다시 받게 되기도 했고.

본격적인 문제는 내가 일을 완전히 관두고 학교를 다시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전에 발생한 문제는 그래도 일하는 도중 쉬면서 발생하는 문제였는데, 이제는 아예 몇년간 돈을 벌 가망이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당장 벌어 놓은 돈이 꽤 있긴 했지만 이제는 잔고가 채워질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건강보험을 고분고분 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첫 학기를 지내고 하반기가 되면서 보험료가 조정되었는데 이게 무주택 무소득자의 액수가 아니었다. 산정기준을 봤더니 근로소득이 잡혀 있더라. 이게 뭔일인가 해서 알아봤더니 근로소득은 이전 원천징수를 기준으로 산정된다고 한다. 작년도 아니고 무려 재작년 소득을! 그땐 한참 일할때라 원천징수 소득이 꽤 있었는데, 이게 땡전 한푼 못 버는 지금에서야 반영되어 보험료를 올리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뭔 밥통같은 시스템이냐! 결국 내가 스스로 재조정을 신청해야 했는데, 내가 2년전 그 직장에서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증명을 해야 했다. 덕분에 난 2년전 퇴직한 곳에 가서 ‘해촉증명서’를 떼어 와야 했다. 일단 보험료를 높게 질러 놓고 그게 아니면 직접 조정하라는 이 말도 안되는 건강보험 체계에 분노했지만, 아쉬운 건 내쪽이었기에 일단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보험료 조정을 받았다.
‘해촉증명서’를 통한 보험료 조정은 2년을 해야 했다. 언급했듯이 재작년 소득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보험료 시스템상, 일을 한 2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재직상태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2년차의 업무처리는 조금 더 번거롭긴 했지만(돈 받은데가 더 많았다) 뭐 한번 해본 거니까. 귀찮긴 했지만 한번 해본거라 수월하게 했다. 그리고 난 이제 진짜 끝인줄 알았다. 더이상은 보험료 조정으로 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3학년이 되었고, 이제 진짜 돈을 번지 2년이 지나서 완전한 서류상 무소득자가 되었다. 그래서 보험료 조정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메일을 확인하다가 보험료가 무려 3만원돈이 나온 걸 확인했다. 이건 또 뭔 날벼락이냐. 보험료 산정내역을 확인해 봤더니 난데없이 내가 몇천만원짜리 전세집에 살고 있는 걸로 되어있는 걸 발견했다. 공짜로 얹혀산지 3년이 되었는데 전세집이라니!! 당장 공단 민원실에 찾아갔다. 담당자는 확인을 해 보더니 그게 내역이 없어서 자동으로 주거비가 책정된 거라는 대답을 해 줬다. 이런 개뼉다구 같은 경우가 어딨냐! 화가 치밀었지만 다행히 담당자분이 굉장히 친절했다. 이게 전산상으로 되는거라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무상거주확인서’라는 서류를 작성해 주셨다. 내가 공짜로 얹혀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라는 것이지. 이걸 왜 내가 증명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친절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드디어! 보험료가 최저액수로 조정되었다.

무상거주확인서를 받은 후 2년간은 매우 평온하게 지나갔다. 이젠 진짜 소득도 없었고, 무상거주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 담당자분이 이 확인서가 2년간 유효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지만 그건 뭐 까맣게 잊은 채 평화로이 2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올 9월에 메일을 확인하다가 충격적인 보험료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까먹었던 새에 내 보험료가 역대 최고액을 경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 확인서의 유효기간이 2년이라는 사실이 기억났지만 이미 학기가 시작되어 업무를 보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외출을 신청해서 일을 보러 갔다. 처음 확인서를 받을 때 워낙 수월하게 일이 처리되어 부담없이 민원실에 방문했다. 근데… 나는 그때 그 친절했던 담당자분이 ‘직권’으로 일을 처리해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상거주 확인을 위해서는 거주지의 등기부등본이나 사업자등록증 사본을 제출하란다. 내가 어디서 명동성당 등기부등본을 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저번엔 그냥 해주셨는데요…’라고 했다가 ‘그건 그 사람이 해준 거고요’라는 차가운 대답을 들어야 했다.
 설명을 듣긴 들었는데, 놀라운 건 그 무상거주 확인을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단 등기부등본이긴 한데, 등본을 뗄 수 없는 경우에는 해당 기관 책임자의 신분증 사본이나 뭐 그런걸로도 한다는 거였다(개신교 교회가 그렇게 많이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래서 책임자가 나와 있는 등본은 안되냐고 했더니 그건 또 안된단다. 기준이 뭐야 도대체! 아무튼 안된다니까 일단 돌아왔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답이 안나온다. 뭘 누구한테 이야기해서 어떻게 받아야 하나…

아무튼 이놈의 건강보험, 특히 지역가입자 보험은 도대체 뭘 이렇게 만들어놓은건지 모르겠다. 일단 월세가 월세액*100으로 재산에 산정되는 것부터 열받는다. 이게 부동산 중개료 산정하는 공식인 것 같은데, 어떻게 매달 지출하는 월세가 내 재산액수가 될 수 있다는 거냐! 내가 500에 25만원짜리 월세를 살면, 이 25만원이 2500만원짜리 ‘재산’으로 계산되어 나는 졸지에 전세 3000짜리 ‘재산’을 가진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계산방법이 어딨냐.
그것보다 열받는 건, 이 재산 산정과정이 ‘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월세나 전세 거주자가 아니라서 전산에 뜨는 게 없으면, 건강보험은 내가 이정도 전세집에 산다고 ‘예측’하여 보험료를 산정한다. 아니 데이터가 없으면 재산이 없다고 간주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일단 때려놓고 억울하면 증명하라는 식으로 짜여진 체계는 진짜 말도 안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보험료를 조정하기 위해 이번 년도에도 발품을 팔아야 했고, 더 팔아야 할 것 같다. 절대 보험료를 내기 싫은 게 아니다. 낼건 내고 살아야지. 다만 좀 더 내 상황에 맞는, 납득할만한 액수의 보험료를 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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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강박

요 몇 년 간 계속 ‘집필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내가 글써서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글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이 계속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생각이 너무 머릿속에 꽉 차서일까. 내가 그 생각들을 말로 풀어놓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글로 풀어놓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막상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켜고 메모장을 열면 뭘 써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리고 오랜 딴짓 후에 겨우 몇 줄 적고 나서는 맘에 안들어 지워버리기를 수십 번, 결국 그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채 비싼 커피만 마시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전에 비해 글을 쓰는 분량 자체는 꽤 늘었다. 어쨌거나 인문학 계열의 학생으로 살아가다 보면 좋으나싫으나 글을 써야 할 일이 꽤 많고, 또 학보사니 뭐니 해서 글을 쓸 기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전에 <쓰고 싶은 글, 써야 하는 글>에서도 썼듯이 아무리 내가 쓰는 글이 많다고 해도 그게 써야 하는 글인 이상, 그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고 만다. 글 한번 시원하게 ‘싸지르고’나면 기분도 상쾌(?)하고 스트레스도 풀리는데, 써야 하는 글은 그 정도 상쾌함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정말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은 예외다). 그러다보니 지속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임에도 계속 집필욕구가 생기는 거고, 그게 급기야는 강박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집필강박의 이유는 또 있다. 뭔가를 하다가, 혹은 하지 않다가 문득 갑자기 글감이 팍 하고 떠오르는 때가 있다. 그럴 땐 머릿속에 문장이 막 떠오르고 (내 딴에는)문학적 기교까지 갖춘 수려한 글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머릿속의 구상이 실제 글로 이어지지가 않는다는 점이다. 꼭 그럴 때만 그런 기가 막히는 글이 떠오르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거의 예외없이 그 생각을 글로 옮기기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있거나, 어딜 가기 위해서 샤워를 하고 있거나, 노트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 기가 막힌 글감은 꼭 그럴 때 나를 찾아온다. 어디 간단히 메모를 해 놨다가 나중에 그걸 쓰려면, 생각했던 것만큼 글이 술술 풀리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그 기가 막힌 글은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실체화될 수 없는 글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기가 막힌 글감을 놓쳤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 또 글을 쓰기 위해 몸이 달게 된다.

이건 어쩌면 집필강박이 아니라 ‘SNS강박’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 인스타 사진 찍으려고 무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있지 않나. 그 사람들 역시 인스타 강박에 빠져 있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일종의 그런 글 컨텐츠 발행에 대한 강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인스타 하는 사람들과 나를 1:1로 대비하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이건 되지도 않는 ‘작가적 자존심’의 결과인걸까. 아무튼 나는 그런 부류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그런 인스타 하는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다만 그 컨텐츠 제작의 욕구를 ‘소비’로 풀어낼 수 있는 그들과는 달리(인스타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핫한 컨텐츠는 ‘소비’를 전제로 한다)나는 풀어낼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겠지.

뭐 아무튼 지금 이순간에도 집필강박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 글 또한 그 강박의 결과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예전에 챙겨놓은 글감을 살려보다가 포기했고, 결국은 이런 힙하지 않은 자기푸념에 가까운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은 이렇듯 내 강박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지도, 해소의 수단이 되지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커피를 마셨으면 이런 거라도 써야겠다는 또다른 강박의 결과로써 의미가 있다. 근데 진짜 이게 의미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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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시놉시스

예전에 모 프로젝트를 하면서 썼던 시놉시스. 예전 메일을 뒤지다가 발견했다.
내용을 보면 아는 사람은 이게 무슨 프로젝트인지 알듯(최종 결과물은 이대로 나오진 않았지만, 대략적인 스토리는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생각보다 잘 안돼서, 또 마음대로 안 되어서 안타까웠지만 지금 보니 모든게 추억.

이거 말고 로맨스 라인도 있었는데 그건 작년 외장하드 사망 때 함께 사망한 듯 하다ㅜ


Storyline: Adventure

#1(intro). 뉴욕, 세탁소. PM 06:00
– 번화한 뉴욕의 한 거리. 하루를 마친 주인공은 수수해 보이는 OZ cleaning이라는 이름의 세탁소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파티에 입을 옷을 세탁하고 있다. 이어폰에서는 해질녘 고즈넉한 세탁소 분위기에 어울리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세탁이 끝나고, 옷을 꺼내는 주인공. 그런데 세탁기 깊숙히 들어간 옷이 나오지 않는다. 세탁조 안으로 몸을 쑥 집어넣는 주인공. 그런데 갑자기 중심을 잃으며 세탁기 안으로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세탁기가 주인공의 몸을 끌어당긴다! 저항해 보지만 이내 주인공의 몸을 집어삼키는 세탁기. 결국 주인공은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2(랜덤 Set 1). 서울, 청계천 한복판. AM 07:00
– 어딘가로 떨어진 주인공. 정신을 차려 보니 얕은 개울가 한복판의 돌덩어리 위에 쓰러져 있다. 전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벽에는 뭔가 동양적이지만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꺼내 위치를 검색해보니… Seoul??  기가 막힌 주인공은 이 황당한 상황을 페이스북에 올리지만, 친구들은 믿지 못하고 비웃을 뿐이다. 일단 거기에서 나오라는 친구의 조언대로 청계천에서 빠져나온 주인공. 일단 어디로든 움직여 본다.

#3(랜덤 Set 2). 서울, 서울광장-덕수궁. PM 01:00
– 걷기 시작한 주인공. 빌딩 가득한 도심을 지나니 널찍한 광장과 왕궁으로 ‘추정’ 되는 멋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와우’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니 친구들이 놀란다. ‘진짜 한국에 간 거였어?’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는 페이스북 친구가 사진을 보더니 ‘이곳은 덕수궁 이라는 한국의 고궁이다’ 라고 알려준다. 덕수궁에 들어가 도심 속의 고궁을 즐기고 있으니 친구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하나둘씩 서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폰. 결국 배터리가 다 되어 꺼져버리고 만다. 헉, 어쩌지… 그래, 일단은 이 새로운 세상을 좀 더 돌아다녀보자! 돌아다니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겠지.

#4(랜덤 Set 3). 서울, 남산. PM 06:00
–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해질녘. 주인공은 폰이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인 ‘남산’ 에 와 있다. 이곳은 사랑하는 연인이 자물쇠로 서로의 약속을 확인한다는 그곳. 맨하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에 감탄하며 잠시 감상에 젖으려는 찰나, 바람에 실려 날아온 전단지 한 장이 눈에 띈다. 클럽파티? 그래, 난 원래 클럽파티에 가는 길이었지! 전단지에 씌여진 안내를 보고 클럽에 찾아가기로 한다.

#5(Ending-Video letter). 서울, 홍대 클럽. PM 09:00
– 오마이갓. 지하철에서 내리자 저녁 9시인데도 마치 막 일어난 것 같은 활기찬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하다. 낯선 동양의 거리임에도 영어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패셔너블한 사람들이 신나게 웃으며 돌아다닌다. 마침내 목적지를 찾은 주인공. 서울의 클럽은 뉴욕의 클럽만큼이나 신나고 즐겁다! 지금의 처지는 모두 잊고 음악에 취해 신나게 즐기는 주인공. 하지만 파티가 끝나고 스테이지의 불이 꺼지자 그제서야 자신이 낯선 도시에 혼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클럽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의 도움을 얻어 스마트폰을 켜고, 이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나를 도와줄 누군가에게 Video Letter를 보낸다. “친구, 내 아파트에서 내 여권을 가지고 서울로 와 줘. 42번가에 있는 OZ cleanning 세번째 세탁기에 몸을 집어넣으면 어딘가로 떨어질 텐데 그곳이 바로 서울이야. 알겠지? 나한테 오는 도중에 신비로운 풍경에 빠져 엉뚱한 데로 새지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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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글이 안 써지는 날

 유난히 글이 안 써지는 날이 있다. 꼭 그런 날은 ‘써야 할 글’ 이 있는 날이다. 직업적 글쟁이들은 마감이 임박하면 없던 글빨이 쏟아져 나온다던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서 마감이 다가올수록 안그래도 모자란 글빨이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글 쓰는데 청소거리 그득한 방구석에서 쓰긴 뭐하고 해서, 나는 쓸 글이 있으면 가능한 한 밖으로 나오는 편이다. 그리고 길바닥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글을 쓸 수는 없으므로, 적당한 커피집을 가서 노트북을 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꼭 마감이 임박하면,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거나 인터넷이 말썽을 부리거나 컴퓨터가 말썽을 부린다. 그런게 없으면, 창 밖에 유난히 샤랄라한 자매님들이 자주 보인다. 밖이 안 보이는 구석자리로 오면, 옆자리에서 포풍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혼을 쏙 빼놓는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으면, 평소엔 들리지도 않던 영어가사가 그날따라 귀에 쏙쏙 박힌다. 영어시험때나 이렇게 좀 들리지.

안다. 이게 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창밖의 자매님들은 언제나 샤랄라했고
옆자리 사람들은 언제나 시끄러웠고
영어가사는 평소에도 그정도쯤은 들렸다는 걸.

그렇지만 이게 다 핑계라는 걸 알고 있더라도
글이 안 써지는 건 변함이 없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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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에 대한 무지(無知)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보 『성신』 21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소설가 김영하 씨는 산문집 『보다』를 통해 ‘부자’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을 보여 준다. 그는<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라는 글에서 진짜 부자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진짜 부자는 비싼 차나 집이 아니라 바로 ‘가난에 대한 천진난만한 무지(無知)’로 자신의 부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평범함에 대한 무지’를 통해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낸다. ‘천진난만한 무지’는 비단 부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발견된다. 귀족들은 서민들의 삶을 모른다. ‘자유’라는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우리들은, 억압받는 수많은 이들의 삶을 모르고 살아간다. 

때로는 그런 무지가 폭력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을 촉발했던 마리 앙뜨와네뜨의 천진한 한마디가 가난한 프랑스 국민들을 분노케 하였듯이, 결핍에 무지한 사람들의 별 뜻 없는 한 마디는 너무나도 쉽게 폭력이 된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 등에서 접하고 분노하는 유명인들의 언행, 그것들 중 상당수는 바로 이런 평범함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들을 했을까? 그들은 그냥 자기에게 익숙한 사실들을 별 뜻 없이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 물정 모르는 한 마디가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이들은 평범함을 일부러라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평범함에 대한 무지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게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역시 평범한 이들의 보통 삶을 의식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고 경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비록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평범한 이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을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무례하지 않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살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얼마나 알고 살아가는가? 당장 우리 나라의 2-30대가 직면해 살아가는 현실에 우리는 관심을 갖고 사는가? 일부의 사람들이 아닌, 우리나라 대다수 서민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담장 너머의 화려함에만 관심을 갖고 정작 그 화려함 속에 숨어 있는 걱정과 고민에 대해서는 모른 채 세상을 안다고,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세상을 모른다. 우리에게는 취업 걱정도 없고, 스펙 걱정도 없다. 알바 걱정도 없고, 생활비 걱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것은 우리가 신학생으로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이런 특권 속에서 사는 건 아니다. 지금도 담장 너머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수많은 걱정들을 안고 살면서, 그것을 잊기 위해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걱정에는 무관심한 채 그 걱정을 덮은 화려함에만 관심을 보인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세상의 아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당장은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아픔에 함께하고, 나아가 훗날 그것을 위로할 수 있는 이들이 되기 위해 당장의 분리된 삶을 산다. 우리가 세상과 떨어져 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이지 세상의 걱정과 풍파로부터 벗어나 고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니다. 담장 밖으로 눈을 돌려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고 그 아픔에 뛰어들 때 비로소 우리는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하늘 나라의 행복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김준휘 | 편집기자(aquinas.kim@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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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 2011년 11월에 메모해놨던 글인데 이제 발견. 완결된 글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미있네. 이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그때의 내가 ‘형이상’이 뭔지 알긴 했던걸까.

불행은 결핍으로부터 온다
이시대에는 형이하의 과잉이 발생해 상대적으로 형이상적인 것들이 결핍
아무도 사색하려 하지 않고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아야만 믿음
이전의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기만의 세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의 사람들은 싸이나 블로그, 페북 같은 좁은 세상만을 가지고 산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사색하고 생각을 발전시킬 여유가 없다. 
여유의 결핍이 우리가 불행한 진짜 이유
자선이 행복한 이유는 그것 자체가 내가
여유롭다는것을 증명하는 방법이기 때문

재물의 결핍 또한 우리가 불행한 이유
돈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모두가 돈이 목표다. 재물이란건 이 세상 모두에게 충만할 수 없다. 
무한대의 목표를 가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불행해진다. 

돈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것을 모르거나, 알고도 실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돈을 통한 행복을 차선책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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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혼자 와서 화장실이 가고 싶을때

 별다방 같은 카페에 인터넷을 쓰러 종종 온다. 특히 신학교에 오고 나서는 교내에서 인터넷을 쓰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쓴다손 치더라도 영상 같은 고용량 데이터를 쓰기엔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보니 주말이면 인터넷을 쓰러 자주 오게 된다.

 뭐 사실 학교 오기 전부터 혼자 놋북 들고 종종 카페에 오곤 했다. 다니던 회사가 좀 자유로웠던 편이라 일이 안풀리거나 답답할 때엔 놋북을 들고 카페에 와서 하루종일 죽치고 앉아 일을 한 적도 있고, 시간이 애매하게 남으면 카페에 와서 글을 좀 끄적이다 가기도 했다. 뭐 지금이야 ‘안 올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 카페를 자주 이용하고 있지만, 예전에도 인터넷 쓰러 카페를 자주 오긴 했다는 말이지.

 아무튼, 이렇게 사람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인터넷 쓰러 놋북 들고 카페에 오면 참 난감한 경우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다. 일행이 있다면야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겠지만, 일행 없이 혼자 오는 경우가 많은 나로써는(여럿이서 오면 생산적인 일 안하고 노가리만 까니까) 놋북을 깔아놓고 화장실을 가기가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그냥 가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만, 나는 쫄보라서 이 비싼 기계를 턱하니 올려놓고 자리를 비울 자신이 없다(고딩때 도서관에서 화장실 갔다가 워크맨을 하나 도둑맞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웬만하면 참거나 아니면 아예 짐을 싸서 일어나는 편이다. 근데 짐을 싸서 일어나기가 뭐할 때도 있는데, 아직 내가 카페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 때다. 시간이 좀 남았거나, 할일이 남았거나 하면 짐싸서 일어나기가 그렇다. 커피를 또 마실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걸 놔두고 일어나긴 싫다. 그래서 보통은 떠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지 않으면, 그냥 ‘참는다’. 이거 엄청나게 고통스럽다. 하는 일에 집중도 안되고. 그래서 몇 번은 놔두고 화장실을 간 적도 있긴 한데, 화장실이 다른 층에 있거나 하면 그것도 쉽지가 않다. 화장실에서 일을 해결하는 내내 불안함에 떨어야 하는데, 어떻게 다른 층까지 가냐.

 예전엔 이런 경험도 했었다. 카페마다 있는 1인석(옆으로 주루룩 앉는 자리)에 내가 앉아 있고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화장실이 급했나 보다. 음악 들으면서 신나게 뭔가 하고 있던 나를 툭툭 치더니 자기 노트북을 잠깐 봐줄수 있냐고 물어본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 했고 그 사람은 화장실을 다녀왔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날 어떻게 믿고 나에게 노트북을 봐달라고 한 것일까. 내가 도둑놈이라면, 도리어 나에게 맡긴다고 부탁을 하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닌가. 아무튼 생판 모르는 옆사람에게 놋북을 맡기는 것도 꽤 신선(?)한 아이디어였지만, 나는 도저히 그걸 실행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일어서고 말지.

 아무튼 이래저래 혼자 놋북들고 카페와서 화장실 가는 건 고역이다. 그렇다고 안 가면 하는 일에 집중이 안 되니 앉아있으나 마나다. 집중력을 생각하면 패기있게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와야겠지만, 내 소중한 놋북(+다른 물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화장실을 다녀올 수가 없다. 이게 참 설상가상인게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시면 거의 매번 화장실이 땡긴단 말이지. 근데 혼자서 카페는 자주 오고. 이렇게 이 딜레마의 상황은 엄청나게 자주 찾아오는데, 아직도 확실한 해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놋북을 놓고 가야 하는가. 참아야 하는가.

근데, 확실히 화장실이 아이디어의 보고(寶庫)인 것 같긴 하다. 방금까지 카페에 앉아 글 두개를 썼다가 마음에 안들어 지웠는데, 짐을 싸서(갈려고) 화장실에 간 순간 글감이 떠올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역시 아이디어가 안 떠오를땐 화장실이 특효약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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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아주 특별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한 늘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아간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지나치는 경우는 많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 생활범위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유형은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다. 나는 혜화동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학교 안의 사람들을 만나고, 학교 밖의 사람들이래봤자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다. 명동은 조금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명동 안의 수많은 외국인들은 ‘여행객’이라는 특정한 카테고리에 묶이는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이라 그들 각자의 개성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난생 처음으로 다녀온 중국 여행은 전혀 새로운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고 내가 그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온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모습으로라도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활인’들을 보고 왔다는 점에서 이번 중국 여행(?)은 나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이번 여행은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런 만큼 각자의 사정도 다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집떠나와 개고생’이었을 거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냥 해외관광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동기들과 함께하는 ‘졸업여행’이었을 거다. 그런 각자의 사정들 중, 내 사정은 조금 특이한 축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을 보았고, 또 사람을 만났다.

 이번 6일간 내가 접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다. 길림성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 길림신학교의 신학생들, 그리고 먼발치에서 보았던 북한 사람들. 이 중 신학생들은 조금은 특별한 상황에서 만났고 그들 역시도 우리와의 만남이 ‘특별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생활’을 보고 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길림성의 중국인들과 압록강 너머의 북한 사람들. 그들은 말 그대로 ‘생활인’들이었다. 사실 이들의 생활에 나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소팔가자에서의 만남을 제외하면 나는 중국사람들을 계속 그냥 지나쳐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나는 그들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북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그들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으므로, ‘유람선을 타고 구경’한다는 다소 껄끄러운 상황을 통해 나는 그들의 생활을 약간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은 어쩌면 북한 당국에 의해 고도로 연출된 장면이었을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아기에 그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날것’에 가까웠다.

 두서도 없이 주절대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을 만나고 왔다. 그러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그들을 내 기준에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니었을까.

 중국 시골의 많은 것들은 참 열악했다. 곳곳에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고, 낡지 않은 거라곤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길은 포장이 덜 되어 질척거렸고, 아이들은 헌옷을 입고 머리를 박박 깎은 채 흙길을 뛰어다녔다. 사방에 옥수수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6~70년대를 연상시키는 삼륜차가 매연을 내뿜으며 지나다녔고,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암흑에 묻혀 버렸다.
 강건너에서 구경한 북한의 모습은 더 열악했다. 낡은 건물들, 추운 날씨에 강가에 나와 물고기를 잡고, 물가에 나와 빨래를 한다. 북한의 모습은 잠깐 본 것이라 묘사할만한 것이 많지는 않지만, 아무튼 ‘열악하다’는 느낌을 갖기엔 충분한 모습들이었다. 중국이나 북한 사람들의  모습 모두,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 번화가인 혜화동과 명동에서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불쌍하다’고 느껴질 만한 광경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과연 ‘불쌍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비포장 도로에서 삼륜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불쌍한 것일까? 추운 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불쌍한 것일까? 나는 어쩌면 지극히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그들을 불쌍한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성찰을 거치고 나니 더이상은 그들의 꾀죄죄한(사실 이 표현도 다분히 주관적이다) 모습이 불쌍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그들의 생활세계 안에서 적당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특별히 불쌍하지도,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을 내가 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그 시점에 나와 버스 안에 있던 이들은 온갖 전자기기를 손에 쥔 채 화려한(=비싼) 옷을 입고 앉아 있었지만 썩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랜 이동으로 다들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스마트폰 하나 없이 해진 옷을 입은 그들도 의외로 썩 불행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건 내 기준에서 ‘결핍되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지, 그들의 입장에서 실제로 결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한 번 의식의 전환을 경험하고 나자, 그들의 생활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소박한 삶이 어쩌면 우리의 으리으리한 삶보다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비싼 물건들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면서도 불안해하고 부족해하면서 살지 않나. 하지만 그들은 자기 몸만 가지고도 썩 나쁘지 않게 잘 살아가고 있었다. 상투적인 말로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은 아니란 말들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항상 그러던 대로 물질적 풍요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고 다른 이들의 생활을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번 여행은 행복의 여러 가지 모습(물론 그들이 행복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을 발견하게 해 준, 또 ‘생활인’으로써의 사람들을 경험한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덧붙이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자 유람선에서 북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왔다는 게 굉장히 껄끄러워졌다. 물론 그런 방법이 아니면 그들을 볼 수조차 없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방법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동물원의 동물들 구경하듯이 구경하고 왔다는 게 마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관광객’과 ‘피관광체’의 관계가 아닌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더 강하게 들었다. 우리는 언제쯤 그들을 인간으로 만날 수 있을까.

딴짓을 하면서 글을 쓰니 글이 중구난방이 되었다.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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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기상

 나 스스로도 믿지 못할 일이지만, 난 벌써 43개월째 꼬박꼬박 오전 6시에 기상하고 있다. 물론 가끔 ‘긴밤’의 은혜(?)를 입고 30분이나 혹은 몇 시간 정도 푹 잔 적이 있긴 한데, 그래도 1년 중 거의 90% 이상은 6시에 꼬박꼬박 일어나는 생활을 3년 반째 해오고 있다. 사실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지난 30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 센세이션한 일이다. 서른둘 이전까지의 나는 전형적인 ‘올빼미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내가 올빼미형으로 살아왔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였다) 저학년 때에도 늦게 잔 기억이 있는걸 보니 태생이 올빼미였나 보다. 그땐 아버지 직장이 늦게 끝나던 때라 다른 집보다 저녁시간이 한참 늦었다. 우리집은 항상 9시 뉴스데스크를 보면서 저녁을 먹었는데, 다른 집은 6-7시에 저녁을 먹는다는 걸 알게 되고 난 후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저녁을 늦게 먹다보니 자연히 자는 시간도 늦어졌고, 뭐 그러다보니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졌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는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분명히! 늦게 잤다. 그땐 야자가 있던 때였고 3년 내내 대부분 오후 9시~10시 정도에 끝났다. 집에 오면 10시가 넘었는데, 나는 절대 집에 오자마자 자는 법이 없었다. 드라마와 11시 토크쇼(그땐 참 토크쇼를 많이 했다)를 다 보고 부모님이 자러 들어가시면 플스를 켰다. 중3-고1 넘어가던 시기에 1년간(!) 모은 돈으로 플스를 장만했었는데, 막상 고등학교에 올라오니 그걸 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열두시 넘어서 플스를 켰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힐 일이다. 그때 하던 게임들이 전부 일본식 RPG같은거라 플레이 시간이 수십~수백시간에 달했는데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그런 게임 엔딩을 수십 개를 봤다. 도대체 게임을 얼마나 한거야… 아무튼 그때 나는 그 게임들을 하려고 밤 열두시부터 새벽 두세시까지 거의 매일 깨어 있었다. 가끔 부모님한테 걸리기도 했지만 뭐 그렇다고 안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러다보면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등교가 7시 30분까지였는데, 6시 반에 엄마한테 온갖 욕을 다 먹으면서 겨우 일어나 학교에 갔다. 그땐 진짜 만원버스에서 버스 손잡이에 기대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아침엔 정말 비몽사몽이었다. 세시에 자서 여섯시 반에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렇게 고등학교를 보내고(지금 생각해도 대학교 간 게 용하다), 마침내 부모님의 품을 떠나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뭐… 거의 낮밤이 바뀐 생활들이 이어졌다. 새벽 네시 전에 자는 법이 없었다.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잠을 일찍 잘 수가 없었다. 밤 열두시가 기숙사에서는 대낮에 가까웠으니까. 술을 마시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아예 외박계를 써 놓고 밤새 술을 마시기가 일쑤였고, 얌전히 방에 있더라도 열두시면 한참 게임에 열중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거기다가 누가 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게임을 하다 보면 밤을 꼴딱 새기 일쑤였다. 새벽 네 시는 기본이었고, 여섯 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그렇게 살다보면 일어나는 시간이 빠를 수가 없었다. 기숙사에선 여덟 시에 아침밥을 줬는데,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그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부지런한 친구가 깨워주거나 갑자기 방장 형이 방 사람들을 다 깨워서 밥을 먹으러 가거나 해서 일어난 적은 있었지만, 절대 8시에 자력으로 일어날 수는 없었다. 8시에 못 일어나면, 쭉 자는 거였다. 1교시가 9시 30분 시작이긴 했는데, 나는 4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1교시 수업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한 번도 없는줄 알고 찾아봤더니 있긴 있더라). 거기다가 주4일 수업인 경우도 많아서,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날이 많았다. 뭐 그런 날은 쭉 자다가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는 뭐 짤없이 6시(동절기엔 7시) 기상… 일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난 해안경계 부대에서 2년여간 복무를 했는데 거긴 밤에 근무를 서고 아침에 자는 그런 부대였다. 늦게 자는 걸 넘어서 아예 밤을 새는 부대였던 거다. 근무표에 따라 생활패턴이 바뀌기는 했지만, 한참 심할 때엔 3~4개월간 ‘오후’ 6시 30분에 출근해 해질때 퇴근하는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다. 즉, 결국 난 군대 가서도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별로 경험하지 못했다.
 제대 후 복학했더니, 1학년 때의 그 올빼미 생활이 이어졌다. 거기다가 고학년이 되면서 팀별 과제가 많아졌는데,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새벽까지 깨어 있게 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야근이었던 거지. 그렇게 야근(?)을 하며, 혹은 게임을 하며 내 대학교 생활의 대부분은 늦게 자고 늦게 자는 생활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직장생활? 뭐 야근이 8할이었다. 회사에서 야근수당 1위를 찍은 적도 있으니(야근으로 한달 만근을 채웠다) 말 다했다. 과제지옥이었던 3~4학년을 지나면서 야근엔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직장에서의 야근은 그야말로 하드코어했다. 과제야 뭐 며칠만 바짝 하면 되었지만 직장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이었기에, 야근은 그냥 일상이 되었다. 매번 집에 열두시 넘어서 들어가니, 당연히 아침 기상시간은 빠를 수가 없었다. 그나마 회사가 다 별로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8시에 겨우 일어나 준비하고 출근을 하는 생활들이었다(그나마도 가끔 늦었다). 날을 새서 잠을 안 자고 6시에 깨어 있었던 적은 있지만, 6시에 ‘기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학교를 왔고 평생 처음으로 6시 기상이 ‘일상’이 되었다. 난 아직도 내가 6시에 눈이 번쩍 뜨인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Benedicamus Domino(모 영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거룩한 장면이 절대! 아니다)를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8시에도 겨우 일어나 출근하던 내가, 벌써 43개월째 6시 기상 중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최소한 3년 반은 더 이렇게 살아야 한다(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걸 생각하면 진짜 놀랄 노자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런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한 번도 사고 안 치고 꼬박꼬박 6시 기상을 해 오고 있다는 거. 이거야말로 진짜 Deo gratias 할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