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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Me

담백한 사람

* 9년전에 써놨던 글을 발굴해서 업로드. 9년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난 참 열정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의 기억을 더듬어봐도 ‘젖 먹던 힘’을 짜내 본 적이 몇 번 되지 않았던 것 같고, 남들이 다 죽을 것처럼 노력하던 고3시절이나 취업준비생 시절에도 그냥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연봉인상을 위해, 승진을 위해, 더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위해 할짓 못할짓 다 하면서 살아가는 치열하고도 치열한 직장생활 속에서도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여유를 부리면서 살아왔다. 물론 그게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아 항상 야근과 조기출근, 휴일근무에 시달리던 나날들이었지만, 야근을 할지언정 내 사정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다소 나태한 마인드가 신입사원 초기의 얼마간을 제외하고서는 항상 몸에 배여 있었다. 그리고 뭐 따지고 보면 내가 빵구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열정 그런 거 없이도 다 잘 해왔고 잘 살아왔다. 다만 ‘더’ 잘 살 수는 없었던 것일 뿐.

그러고 보면 내가 살아온 방식은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인 ‘담백함’과 참 닮았다. 어쩌면 내가 담백함을 좋아하는 것과 내 인생이 닮은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담백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난 참 한국사람답지 않게 매운 맛, 신 맛 이런 극단적인 맛보다는 담백함이 참 좋다. 말이 좋아 담백함이지, 한국사람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싱거움’에 가까운 맛이다. 이도 저도 아닌 맛, 딱 집어서 특징이 없는 맛, 밍숭맹숭한 맛이고 이걸 사람한테 갖다 붙이면 썩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을 그런 단어이다. 어떤 면에서는 ‘회색분자’란 표현하고도 닮아 보인다. 새빨간 사람도, 새파란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 따지고 보면 담백함이란 표현은 어쩌면 온갖 허접하고 부실한 특징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난 ‘담백함’이 좋고 담백한 사람이 좋다.

그래도 ‘담백한 사람’이라고 하면 뭔가 깊이가 있어 보이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사실 담백함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오랜 시간 끓여낸 사골국물, 은근히 우려낸 멸치국물, 자극적인 소금간 없이도 식감을 돋우는 그런 맛.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그런 맛은 아닐지라도, 식탁을 떠나면서 생각나고 잠자리에 누우면 다시 한 번 생각나는 그런 맛. 사람도 마찬가지다. 물론 열정적인 사람, 굉장히 멋있다. 팔을 걷어붙이고 소리를 질러가며 야근에 철야에 맡은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완수하고 성대한 축하자리에서 비싼 양주를 들이킬 수 있는 사람, 열 명 중 여덟아홉명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로 그런 사람. 나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 부러워 보였고 그런 사람이 멋져 보였다. 하지만 별로 나이도 지긋하게 먹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그냥 나는 담백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묵묵히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남들은 잘 모르거나 심지어 ‘뭐 이런걸?’하고 무시할만한 나만의 여가활동을 즐기며, 크게 기뻐하지 않고 크게 슬퍼하지 않는 삶. 언젠가부터 그런 삶이 ‘이상적인 내 삶’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어쩌면 나는 그런 삶을 위해 얼마 전부터 방향을 바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새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으리으리한 관광지보다는 그냥 동네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게 좋고, 어제 나온 최신 음반보다는 오래되고 사람들도 잘 모르는 괴상한 음악들이 좋다. 굳이 1등을 하고 싶지도 않고, 남들에게 크게 주목 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좋은 집과 좋은 차가 탐나지도 않고(물론 누가 공짜로 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전도유망한 능력과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직책도 별 관심이 없다. 어찌 보면 누가 봐도 평범한 소시민의 삶, 전형적인 꿈 없는 루저의 인생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잘해 봐야 육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일 인생(성경에 나오는 표현인데 요즘은 이것보단 더 오래 산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내 스스로도 참 영감님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정말 그렇다. 일희일비하면서 죽을 둥 살 둥 사는 것보다는 담백하게 사는 게 훨씬 편안하게 사는 방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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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est

강론 B cut

강론을 쓰다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이 빈약한 묵상으로 할말을 제대로 생각해놓지 않은 탓이긴 하지만, 가끔은 진짜로 신나게 써 놓고 나니 뭔가 내용이 어렵거나, 딴길로 샜거나 해서 확 엎고 다시 쓰는 경우들이 있다. 그렇게 쓰는 두 번째 강론은 보통 평이한 내용이 되기가 쉬운데, 그렇다보니 순식간에 다 쓰게 되어 ‘아 이럴거면 나는 왜 몇시간씩 그런 어려운 쌉소리를 쓰느라 고생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허탈감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썼지만 읽지 못한 강론 ‘B cut’들이 몇 개 있다. 물론 뭐 안읽고 넘어갔으니 그냥 버리면 되는 거지만, 가끔은 이 B cut도 조금 아까울 때가 있다. 강론이란 게 제한된 시간(얼마전 교황님이 10분이 넘어가는 강론 가지고 뭐라고 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안에 글이 아닌 말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보니, 내가 아무리 기가 막힌 내용을 준비했더라도 그게 10분 내에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면 쓰기가 곤란하다. 그 말인즉슨, 내용이 거지같아서 버린 건 아닐 때도 있다는 뜻이고(물론 내용이 거지같아서 버린 경우가 태반이다) 내용을 좀 더 길게, 또 글로 전달한다면 꽤 그럴 듯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아까운 강론 B cut을 어디 블로그 같은 데에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냥 날리기는 아깝고, 어차피 올해 못 써먹은 강론은 내년에도 못 써먹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올해 부족했던 강론이 내년에는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다). 그렇지만 좀 더 여유있게 써도 되는 ‘글’로써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물론 내 게으름이 그런 B cut의 모음집 발행(?)을 방해하고 있는 것도 있고 그 B cut이란게 어디다가 따로 모아 놓을 정도로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 원대한 계획이 현실화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A cut 강론도 따로 발행을 안하는데 무슨 B cut까지 모아놓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다.

뭐 어쨌거나 유사글쟁이가 된 덕분에 글은 매일 오지게 쓰고 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밑천이 애진작에 드러나 매일매일 머리를 싸매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못써서 펑크를 낸 적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 다른 놈들은 한시간만에 뚝딱뚝딱 써 놓고 놀던데 나는 왜 그게 잘 안돼서 몇시간씩을 날려먹는지 모르겠다(‘시간을 날려먹는다’는 건, 실제로 강론 쓰다가 진도가 안 나갈 때 딴짓을 하는 시간이 많아서 하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이렇게 맹글어낸 강론이 질도 별로라면… ‘글 좀 쓴다’고 자만했던 예전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이러니 내가 브런치를 계속 까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무튼 또 쓸데없는 넋두리였지만, 나도 명쾌한 내용으로 후다닥 강론 생산해내는 그런 ‘직관적’인 신부가 되고 싶다. 되지도 않는 짱구 굴리면서 골방철학자 같은 내용 썼다가 갈아엎는 그런 멍청한 짓좀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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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Me

경쟁 공포증

세상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경쟁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사실 내가 진짜로 경쟁을 싫어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지는 걸 싫어하는건지 나도 헷갈리기는 하다. 근데 지는게 싫든 경쟁이 싫든 나는 어쨌거나 그 이유 때문에 경쟁을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한다. 이게 경쟁을 싫어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난 경쟁이 싫다.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살다 보면, 경쟁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좀 의아하다고 여기게 될 때가 있다.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지난해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사태가 기억이 난다. 뭐 나야 그사람들이 정규직이 되든말든 상관없는 사람이어서 ‘고용보장 받으면 좋겠네’ 정도의 박애주의적인 태도로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인국공 사태에 분노하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말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인국공 사태가 철없는 몇몇 이들의 배배꼬인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보편적인 반대정서에 부딪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인국공 사태에 분노했나? 내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에 대해서는 뭐라 평가할 수가 없으니 넘어가고, 내가 만난 ‘인국공 사태 분노자’ 들을 살펴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경쟁적인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한마디로 그들은 전부 공무원이었다. 사실 공무원 시험을 보러 저렇게 죽자사자 공부하는 사람들 역시 나는 이해가 잘 안 된다(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내가 이해를 못한다는 소리다). 어떻게 남들보다 1점 더 받으려고 저렇게 몇년씩 공부를 하지? 경쟁을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1점 모자라 떨어지는 시험을 붙기 위해 몸 상해가며 하기싫은 공부를 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일을 알아보는 방법을 택할 것 같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분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결코 아니다. 나는 경쟁이 싫은 사람으로서 경쟁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택하겠다는 것 뿐이다. 경쟁을 피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비록 경쟁을 이겨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작다 하더라도.

아무튼, 그런 초 경쟁적인 시험을 통과해서인지 그들은 경쟁을 통하지 않고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에 ‘무혈입성’ 하는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나는 여러 뉴스나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수백 수천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하기 위해 인생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절차 없이 승리의 결과물을 얻게 될 수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였을까? 여전히 나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인국공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그렇게 분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왜 분노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로 내 ‘경쟁 공포’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내가 경쟁을 싫어해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은 별거 아닌 것들도 많다. 술게임을 하면 이기려고 발악을 하기보다는 그냥 술 먹지 하면서 패배자의 위치를 받아들여 게임을 김빠지게 만들기도 하고, 무슨 대항전 같은 걸로 축구 같은 걸 하면 (어차피 잘하지도 못하지만) 무기력한 모습으로 시간을 때우며 승리를 갈망하는 팀메이트들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어렸을 때 오락실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그때 한참 핫했던 대전격투게임은 그렇게도 못했던 내 모습을 보면, 경쟁이 삶의 원리이자 즐거움인 사람들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경쟁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포기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통찰 아닌 통찰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난 경쟁이 싫다. 상대평가의 시대에 나만 만족하면 됐지 하는 삶을 살아서는 결코 윤택한 삶, 자랑하면서 부러움을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삶이 문제가 아니라, 경쟁을 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의 위협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난 경쟁이 필요없는 세상으로 왔다. 물론 여기에서도 잘나가는 신부 못나가는 신부 비교는 늘 있고 나름대로의 경쟁과 줄세우기도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내가 경쟁에서 뒤떨어진다고 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할 필요는 없고, 사람들에게 경쟁이 삶의 원리라고 떠들지 않아도 된다. 비교우위가 아니라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공동선의 상태를 이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난 내 할일 하면서, 고만고만한 보통 신부로 살아가고자 한다. 경쟁이 싫다는 거지 할일 못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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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ian

떠나기 전

‘떠나기 위해 사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런 데가 어디 있냐 싶겠지만 감옥이 그렇고, 병원이 그렇고, 또 군대가 그렇다. 그리고 또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학교도 그런 축에 속하는 것 같다. 떠나기 위해 사는 곳. 시간이 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곳.

신학교도 그 떠나기 위해 사는 곳에 속하는 걸까?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거다. 신학교에 있는 신학생들은 누구나 다 졸업해서 신부가 되기를 원해서 여기 있는 거니까. 적어도 지금까지 나는 신학교 생활이 즐거워서 신학교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뭐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럴려고 신학교를 온 거니까.

그렇긴 한데, 떠나는 것이 목적이긴 한데 떠날 때가 된 지금 입장에서는 너무 떠나기 위해서만 신학교 생활을 해 온 것 같아 조금 아쉬운 것도 있다. 7년이란 기간이 그렇게 짧은 기간도 아닌데, 그 시간 동안 온전히 떠날 날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건 좀 아쉽지 않나. 물론 신학교 생활에 안주하자는 건 아니고, 그 시간은 그 나름대로 가치 있는 시간일 텐데 이렇게흘려보내는 데에만 몰두해서 살아간 시간들이 조금 안타깝더라는 거다.

나의 신학원 생활은 행복했을까. 분명히 어느 순간까지는 당연히 그랬다고 생각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대답에 진실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누군가가 신학교 생활 행복하냐 하고 물으면 그랬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100%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그랬다면 어떻게든 사고가 났을 거다), 예전의 그때처럼 진심을 다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사실 7년 간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평균치로는 겨우 행복 쪽에 살짝 발을 걸치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외부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다. 신학교는 변화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수차레 요동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피라미들인 우리는 그 흔들림에 속절없이 부대꼈다. 그건 분명히 나의, 그리고 우리의 행복도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신학교 생활의 불만족이 온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너무 오래 다녔던 건 아닐까. 썩 자랑스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이 정도로 오래 소속되어 있었던 곳은 없었다. 아, 이전 대학교가 있긴 하지만 그건 4년의 휴학 기간이 포함된 거니까. 막판에는 거의 학교 학생이란 자각이 없을 정도로 소속감이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활동 상태로’ 소속된 곳이 바로 이 신학교인 거다.

너무 오래 다녀서 매너리즘이 온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오랜 기간동안 이 조직에 소속되어 실망스런 모습들을 많이 보았고 그게 내 신학교 생활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나 스스로도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특별히 신나는 일이 생기지 않는 현실, 거기에 신학교의 답답한 현실은 양념을 친 것에 불과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현실이 갑갑해도, 심지어 양업관 때는 그것보다 더 암담한 삶(?)을 살면서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뭐가 부족해서 푸념이 일상인 삶이 되어 버린 건지. 그런걸 보면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게 이유로 생각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냥 여기에서 지내기만 해도 즐거웠던 시간이 있었다. 옆에 있는 이들이 무슨 짓을 하던 관계없이 내 삶을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근데 떠나는 시점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남들 놀 때 뭔가 하고 있으면 억울했고, 남들 나갈 때 못 나가면 손해보는 느낌이 들었다. 남들과 상관없이 기도하고 남들과 상관없이 책을 읽던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요즘에는 ‘형제애’라는 명목 하에 너무 가까워져버린 사람들(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닥 가깝지도 않은 듯 하지만)과 다른 나만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냥 시류에 흘려가면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 같아 안타깝다.

안 좋은 모습은 전염이 빠르다. 그렇게 우리는 안 좋은 모습을 서로에게 전염시켰고, 그 속에서 나는 스스로의 자각보다는 매너리즘으로 이 신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이게 내가 신학교 생활이 늘 즐겁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떡하나. 끝나는 날이 정해진 신학교 생활과는 달리 앞으로의 생활은 정해진 끝이 없을 텐데. 여기에서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걱정이 드는 요즘이다. 물론 나는 열심히 할 생각이고 자신도 있다. 하지만 그건 신학교에 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엔 내가 이렇게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곳으로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물론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라는 희대의 명언처럼, 그냥 열심히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부디 이제는 떠나기 위해 사는 일이 없도록. 이 순간이 그 자체로 행복하도록.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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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분류

21세기

요즘 말도 안되는 이유로 21세기임을 실감하며 살아간다. 재택근무에 온라인 강의라니 그야말로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거기다가 바깥 풍경은 사람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다 우주인을 연상케 하는 ‘레벨D’(그 이름도 가히 미래적이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되니 이 또한 우리가 상상해왔던 펑크적인 미래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요 몇달 사이에 미래세계의 희망편과 절망편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듯 하다.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지만)네트워크로 업무를 보고 학교를 다니는 모습과 전지구적인 역병으로 사람들마다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모습.

이제 마스크 쓰는 게 예전만큼은 거추장스럽지 않을 정도로 지금의 이 상황에 우리는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된 것 같다. 물론 마스크 쓰는 것과 일명 ‘사회적 거리 두기’로 지칭되는 반격리 상황은 결코 완전히 편해지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이정도로 사태가 장기화되고 심지어는 아직도 속시원한 솔루션이 등장하지 않아 얼마나 갈 지 속단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이 거추장스러운 상황에 준하는 어떤 ‘새로운 사태’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놓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전문가들의 아티클 중에 ‘뉴 노멀’을 준비해야 한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나는데, 읽으면서는 썩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상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일이 지나고 지나면서 정말로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상황을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이것보다는 약간 나은 상황이 우리의 새로운 일상이 된다면, 정상 상황에서는 도저히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일을 하는 나같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지금이야 초반이니까, 임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서 아쉬운 대로 정상 상태를 대신하는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고착화된다면? 이런 질문은 이제 어떤 처지에 있는 누구라도 할 만한 것이 되었지만 정체성 자체가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조금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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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est

직업적 글쟁이

어쩌다보니 거의 매일 글을 쓰고 그 글을 여러 사람들에게 읽으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읽기 위한 글이니 정통 글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매일 2천 자 가량의 글을 쓰면서 살아가니 어느 정도 글쟁이 비슷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나는 직업적 글쟁이가 된 것이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직업적 글쟁이들은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없던 글빨도 솟아나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마감이 다가와도 글을 못 써서 헤맨다는 투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만해도 마감이 코앞에 닥치면 기적적으로 좋은 글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새벽 두시에 쓴 글도 결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몇 차례에 걸쳐 깨달은 다음 ‘초보 직업적 글쟁이’로서의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 내가 마감이 닥쳐도 글을 못 쓰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신학교 입학 초반에 내 특기를 ‘짧은 내용을 길게 늘여쓸수 있다’는 걸로 어필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확실히 그랬다. 보고서가 쓸 게 없어도 어영부영 지껄이다 보면 분량은 금방 채웠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뻥튀기된 글이 꽤 그럴듯했다. 나는 이렇게 꽤 실용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학교에서의 7년이 지나고, 7년 동안 철학과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배웠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소박하다) 이제 더이상 아무 소리나 지껄여서 분량을 뻥튀기하는 스킬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뭐 이바닥의 글이 너무 난해한 탓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제 그런 글에는 일종의 ‘혼’을 담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 줄의 글을 한 줄로 줄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글이 아닐까. 온갖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갖다 붙여서 한 줄짜리 글을 열 줄짜리로 만든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한 줄의 내용만을 받아들일 뿐이다. 더군다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은 확실한 ‘청자’가 있는 글이다. 글을 쓰고 읽으면 바로 반응이 온다. 쌉소리를 써서 분량을 채우면 잠은 잘 수 있지만, 다음 날 읽고 나서 영 개운치가 못하다. 사실 반응이 직관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내가 찜찜하기도 하고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는 자책 같은게 든다.

마음 속에 채워진 게 없는데 글을 쓰는 건 참 어렵다. 계속 글을 쓸 거리를 마음 속에 채워 넣어야 하는데 영양가 있는 건 채우지 못하고 하루종일 유튜브나 보면서 낄낄대고 있으니 이미 바닥난 밑천이 채워지지 않아 조급한 마음만 든다. 그래서 다른 글쟁이들은 늘 자료조사를 하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각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 나도 ‘자료조사’를 해야 하는데 정작 하지는 않고 해야지 해야지만 하다가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 근본 없는 글쓰기를 하고 허겁지겁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뭐 사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하는 것도 해야지 해야지 하는 소리의 일종이니. 이런 쌉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내가 할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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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ian

‘단합대회’의 몰락

좋든 싫든 조직에 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에게 특강이나 ‘단합대회’조의 행사는 스트레스의 온상이 된다. 뭐 물론 그런 행사의 근원이 되는 조직문화를 내면화해버린 많은 ‘높으신 분들’이나 높지도 않은데 내면화만 해버린 정신승리자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팀웍이나 개인의 수준향상 등의 목적으로 강제소집되는 강연이나 행사는 수많은 이들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일쑤다. 때로는 더욱 고귀한 목적을 위해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소환되기도 한다. 그 비근한 예로는 대한민국 20대 남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예비군 훈련’이 있겠다.

이런 집단행사가 스트레스의 온상이 되는 이유는 당연하다. 강제로 끌려와야 하니까. 조직 내에서 많은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분의 판단에 의해, 혹은 ‘그냥 좋겠다’싶은 한 마디 때문에 명줄을 건 많은 이들이 자유시간을 반납한 채 어딘가에 모여 의욕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물론 많은 집단행사는 작당한 수준의 보상을 제공하기도 한다. 간식이나 기념품을 준다든지, 회사의 경우라면 근무시간 인정을 해준다든지.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는데 왜 참여안해’라는 마인드로 열리는 집단행사는 당근도 없이 내 멘탈에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 물론 집단행사를 추진하는 분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누가 사람들 괴롭히려고 그런 번거로운 일을 조직하나. 자기 딴에는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어 자신의 수고를 들여 일을 추진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기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가 된다. 그 일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추진자가 생각하는 대로의 도움은 절대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배움은 다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배워야 할 것, 좋은 것들을 준비해 놓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푸쉬를 하는 거다. 딱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지. ‘주입식 교육’. 학습 내용에 관심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아이들을 앉혀놓은 다음 앞에서 막 떠든다. 그러면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배우기 전에 동기부여는 전혀 없고,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강제성만 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스스로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고, 우리가 말하는 수재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왜 여기 앉아 있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있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하니까’. 그건 공부를 잘 해야 하는 이유이지 교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하기 위해 학원에 가고, 학교에선 잔다.

사회에서 경험하는 많은 집단행사도 이런 주입식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의 발전이나 조직의 발전. 뭐 그런 것들을 준비해 놓고 그냥 푸쉬를 한다. 정말 우리에게 좋은 거면 어련히 알아서 참석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를 염려해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높은 분들의 배려 아닌 배려로 인해 우리는 선택권 없이 그 ‘좋은 기회’에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판단해 참여했다면 충분한 동기를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그 행사를, 끌려왔기 때문에 어떠한 동기부여나 참여의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억지로 하게 된다. 학교에서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조는 것처럼, 행사나 특강에 온 많은 이들도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버린다.

사실 집단행사나 주입식 교육은 모두 우리의 20세기를 지배했던 집단주의의 산물들이다. 충분한 수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계몽하는 것. 숙련되지 못한 대량의 인력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 이것을 위해 우리는 몇몇의 집단으로 분류되었고 그 집단의 단위로 컨트롤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지나친 ‘개인주의’를 우려할 정도로 사람들은 개인화되었고,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의 실현을 도모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들의 역량도 향상되었다. 과거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없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소속감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학생’ 혹은 ‘직장인’이라는 카테고리로 한 인간을 규정할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든 거다. 그런데 이들을 관리하는 방법은 여전히 ‘학생’ 혹은 ‘직장인’의 카테고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는 이들에게 획일화된 방법 하나를 강제하니 그게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지금 시대의 양성은 ‘방법’이 아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 스트레스의 근원인 수많은 집단행사는 바로 그 ‘방법’들 중의 하나다(그마저도 충족하지 못하는 집단행사는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자). 목적은 공감하나 그 시기와 방법에 동의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선택권’이다. 집단행사에 대한 선택권을 주면, 그건 공감하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주어진 ‘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 그 정도도 동기부여를 못하는 사람은 관둬야지. 하지만 그 정도 동기부여는 된다고 가정하면,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적지 않은 사람이 그 기회를 활용하려 들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에 그 행사의 효과도 적절하게 발휘될 것이다. 생각보다 스스로 하는 일과 억지로 하는 일의 능률 차이는 크다. 그렇게 적절히 기회를 활용하는 사람은 하고, 아닌 사람은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것도 안하는 사람은 결국 도태될 것이다. 야박한 소리이지만 의지가 없는 사람은 딴길 알아봐야지. 이렇게 해야만 양성의 결과가 내면화될 수 있을 것이다. 주입식 교육을 통한 세뇌가 아니라 진짜 내면화. 그거 해야 진짜 오래가는 인재가 될 것 아닌가? 언제까지 존버해서 승리한 개살구들만 내놓을 것이냔 말이다.

* 사실 특정한 배경이 있는데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뭔소리야 싶은 알쏭달쏭한 글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힌트는 다 있으니 들을 귀가 있으면 알아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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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어감에 대한 깨달음

서울에 산 지 15년이 되어 간다. 15년이라니 참 징그럽다. 15년 전에도 난 어른이었는데 지금도 그냥 어른이구나. 그때는 15년이 지나면 엄청난 사람(어떤 방향으로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니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좀 서글프다. 그렇다. 난 나이를 먹은 것이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게 된다. 내가 집중력이 없는 건지, 내 시야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면 한번씩 그쪽에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문앞 자리는 나에게 쥐약 같은 곳이다. 문이 열리면 자동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가니까. 뭔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참… 집중력이 부족한 인간이다. 아. 할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 20대들인 것 같다. 대학로니까 그럴 수도 있고, 만만한 스타벅스니까 그럴 수도 있다. 아무튼 대학로 스타벅스에 앉아 있으면 이 스무살 언저리들의 존재를 자주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종종 나 자신의 위치가 느껴져 묘한 기분이 드는 경우들이 있다.

 1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나는 대학로에 있었다. 이 동네에 살았다는 게 아니라, 여기 왔던 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커피를 마셨고, 술집을 갔고, 길거리를 걸어다녔다. 그때에도 분명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을 거다. 그때 나는 내가 그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20대의 내가 20대가 많은 대학로에서 20대처럼 놀고 있었던 거다. 뭐 당연한 소리지만.

 시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대학로 20대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커피집에 앉아 있다. 나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기 대학로에 앉아 있고, 내 주변에 20대들이 돌아다니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때엔 쟤들도 20대 나도 20대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을 때 뭔가 모를 감정이 느껴진다. 늙어서 서럽다 뭐 그런 것보다는, 시간의 빠름에 대한 놀람 같은 느낌 정도일까. 나는 그대로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대로 있었는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물론 그때 그들은 나와 같아졌겠지만), 이제 나는 그들과는 구분되는 ‘아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특별히 젊게 산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정도로 나이 먹었음을 의식하고 살지도 않았다. 15년 전의 나에게 30대 후반이란 까마득한 미래였고, 나와는 큰 관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뻔뻔하게도 나는 그때의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전날 먹은 술이 예전처럼 빨리 깨지 않아도, 뒷목이 뻐근하고 움직이는 게 귀찮아도, 눈이 침침하고 모니터의 작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도 다 내가 건강관리를 못한 탓이지 나이가 들어서라고 생각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열 살 어린 동생들이랑 사니 스스로 늙은이요 아재라고 칭하며 궁상맞은 척을 했지만, 실제로 내가 늙었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근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로 내 나이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짜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예전엔 이 젊고 예쁜(혹은 멋진)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는 ‘예쁘거나 멋지지 않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같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떠오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래,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근데 아직도 이렇게 애처럼 살고 있다니, 적어도 이쯤 되면 조금 더 중심을 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덧.서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늙음 한탄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다 창문 바라보는 1인석을 많이 마련해놓지 않은 스타벅스 대명거리점의 탓이다. 괜히 홀 한가운데 앉아서 사람들 보다가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리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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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 포에버

몇년 전 영화 <블랙팬서>가 개봉했을 때, 무슨 대단한 흑인 영화인양 호들갑을 떠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블랙팬서>는 재미있는 영화였고 부족전쟁 같은 느낌의 스토리나 비주얼 역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무슨 ‘흑인을 위한 영화’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할 만한 건가 싶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실 그렇게 이 영화를 개념영화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가소로웠다. 나에게 블랙팬서란 아프리카 스킨을 쓴 헐리우드 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즘 PC(Political Correctness)로 묶일 수 있는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아니면 그것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외면하거나 잊혀져 있던 어떤 가치들를 담은 상업 컨텐츠가 많이 나온다. 제일 자주 보이는 건 아무래도 페미니즘 관련 컨텐츠이겠지. 이건 내가 뭐 딱히 코멘트할 것도 없고 코멘트할 자신도 없으니 넘어가지만, 아무튼 요런 것들을 내세우며 개념 컨텐츠인양 하는 것들이 많이 보이는데 그런것들을 볼 때마다 정말 그건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하구나 하는 걸 느끼는 경우가 많다.

블랙팬서를 예로 들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와칸다 포에버’ 풍의 스타일이 잔뜩 발라져 있지만 그 기반의 구조 자체는 유럽인이 비유럽인들을 보는 전형적인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그런 거다. 사실 비브라늄(맞나?)이 넘치는 비밀의 나라 요런 세계관은 딱 ‘엘도라도’의 그 세계관이다. 유럽인들이 남미 와서 황금의 나라 찾던 그 세계관이 바로 블랙팬서의 세계관인 거지. 그리고 그 비밀의 나라가 과학이 엄청 발달해서 유럽인들을 압도할 정도라는 설정 역시 ‘신비의 동양 무술’ 뭐 이런 걸로 대변되는 서구적인 시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웅들이 힘을 모아 세계의 위기를 막아낸다 이런 서사 역시 전형적인 서구 영화의 것이 아닌가 말이다. 세계관이 이런데, 고작 흑인 캐스팅이나 아프리카 스타일 소품 따위로 흑인 영화의 새 지평을 연 것인양 하고 있는 건 진짜로 그냥 세일즈 포인트에 불과한 거다.

사실 마블 영화들이 좀 다 이렇고, 한국 영화 중에는 CJ영화나 그 계열 드라마들이 특히 이런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인 것 같다. 인종, 여성, 역사의식 등의 포인트들을 살짝 발라놓고 그게 무슨 대단히 의식있는 컨텐츠인 양 하는 것이지.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 하나가 게이라고 해서 그게 그 영화의 성격을 규정지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화가 정말로 그런 열린 관점에서 이슈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보여주는 것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런 모습들이 ‘이레귤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것이 그런 소수자 이슈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뭐 요즘 보면 딱히 그런것만도 아닌 것 같다만) 근데 그걸 극의 흐름과는 별개로 노골적으로 깔아놓은 건 그냥 그게 ‘세일즈 포인트’라고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갑자기 주인공이 최신 스마트폰을 브랜드가 잘 보이게 들고 기능자랑을 하는 PPL처럼 말이다.

창작자의 예술적 기질보다는 기획자가 배치하는 흥행 포인트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의 컨텐츠 시장에서, ‘개념작’소리를 들으며 잘 팔리는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이야기의 예술적 완성도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업 컨텐츠니까 잘 팔려야지. 근데 잘 팔리는 걸 만들기 위해 ‘잘 선정한’ 주제를 송곳처럼 배치해 놓고 그게 무슨 진정성 있는 문제작인양 생색내고 그걸 소비하면서 개념인인양 드러내는 요즘의 현실은 과연 이 자들이 진짜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시대에 진정성을 찾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나이브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표면적인 ‘스킨’만이 문제들의 본질인 양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시대에, 깊이 있는 생각들은 시간낭비 취급을 받으며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들은 좋아요 한 번으로, 인스타그램 관람인증 하나로 해결되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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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혹은 가난한 이

나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때문인지 유난히 길거리 헌터(?)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잦다. 아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길거리 헌터의 카테고리는 다 당해본 것 같다. 도를 아십니까는 기본이고, 그리스도교 계열의 가두선교나 각종 사이비 종교의 포교활동, 설문지나 모금(사실 이것들도 상당수는 다 사이비로 이어진다) 등에도 안 걸린 적이 없다. 이쯤 되니 이젠 길거리에서 누가 툭 치기만 해도 아 또 왔구나 싶은 촉이 올 정도다.

뭐 길거리에서 누굴 만나든 이제 초연해질 정도가 되었지만, 요근래 갑자기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하는 부류의 길거리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돈을 원하는 이들’이다. 그냥 ‘걸인’이라고 해도 되지만 사실 길바닥에 깡통 하나 깔아놓은 전형적인 걸인뿐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교통비 조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걸인’이라는 특정 단어로 한정할 수는 없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걸인에 해당하지만.

아무튼 이 ‘돈을 원하는 사람’이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는데, 이유인 즉슨 저번에 나를 꽤 괴롭게 했던 <언행 불일치> 사건 때문이다. 사실 이전엔 이런 사람들은 그냥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한번 직장인 시절에 길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이에게 오만 원이란 거금을 준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뭐 그때야 한참 영적으로 맑았던 시절이었고 또 돈도 벌고 있었으니 적선하는 셈 치고 준 거였다. 그걸 페북에 올렸더니 호구로 몰려 한동안 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말이다. 뭐 그럴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내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또 괜히 사기꾼들한테 돈 쥐어주기 싫다는 생각도 들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도 쿨하게 무시했다. 하지만…

지난 번 그 사건 이후 길거리에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모든 ‘돈을 요구하는 이들’을 도매금으로 사기꾼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중에 최소한 한 명은 정말 돈이 급해서 어렵게 용기를 낸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아니, 설령 그들이 사기꾼이라고 해도 내 돈 만원 이 만원이 필요한 ‘가난한 이’라는 점은 맞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들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으로 지나가다 만나는 모든 ‘청하는 이들’에게 돈을 줄 정도로 내가 여유롭지도 않을 뿐더러, 귀찮음과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 덕분에라도 나는 앞으로도 돈을 선뜻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사기꾼 취급해서, 나쁜 놈들이니까 저들한테 돈을 주는 건 나쁜 일이야 하고 생각하며 합리화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